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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2 기준 최신판



조선초기에 화통(火㷁)으로 무장한 병종(兵種).

내용

조선초기 화통군은 고려말의 화통방사군(火㷁放射軍)에서 유래한다. 화통방사군은 고려말 최무선에 의해 만들어진 화통도감(火㷁都監)에 속한 군인으로 주로 사사노비(社寺奴婢)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화통도감이 폐지되고 군기시(軍器寺)로 통합됨에 따라 이들도 군기시로 그 소속이 바뀐다. 조선 왕조가 개창된 이후 중앙의 병기창(兵器廠)으로 군기감(軍器監)이 성립되는데 이 군기감은 고려말의 군기시를 계승한 것이어서 화통방사군은 화통군(火㷁軍)으로 이름만 바뀌고 계속하여 군기감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이때 화통군은 신분상 천민이지만 사사노비(社寺奴婢)가 아닌 각관(各官)의 관사노비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화통(火㷁)이나 화차(火車)를 방사(放射)하는 임무를 가졌는데 화통역(火㷁役)은 대단한 고역(苦域)이었고 이들은 노역군으로 사역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태종대에는 두 차례에 걸쳐 혁파된 사사노비(社寺奴婢)들이 대거 화통군(火㷁軍)에 분속(分屬)되면서 화통군이 가진 화기방사군으로서의 특수성이 점차 약화되었다. 따라서 1416년(태종 16)에 오면 결국 화통군은 폐지되고 명칭도 조역노(助役奴)로 바뀌었다. 이러한 화통군의 폐지는 새로운 병종인 군기감별군(別軍)이 출현하면서 더욱 조장되었다. 별군은 화통군이 천민들로 구성되었던 데 비해 양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임무는 화통군과 본질상 다르지 않았다.

용례

火㷁軍及其人之役 亦爲艱苦 戶曹宜考各官鄕吏之數及官寺奴婢之數 隨其多少 更定其額 以均勞逸(『태조실록』 7년 9월 12일)

참고문헌

  • 許善道, 『朝鮮時代 火藥兵器史硏究』, 一潮閣, 1994.
  • 金一煥, 「朝鮮初期 軍器監 別軍考」, 『실학사상연구』12, 1999.
  • 金泰振, 「鮮初 銃筒衛의 樣相」, 『南都泳博士華甲記念史學論叢』, 太學社,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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