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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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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지석 |
한글표제 | 지석 |
한자표제 | 誌石 |
상위어 | 상례(喪禮) |
관련어 | 백자지석(白磁誌石), 묘지석(墓誌石) |
분야 | 생활·풍속/가례/상례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정해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지석(誌石)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44년 2월 17일 |
피장자와 관계된 기록을 새겨 능(陵)·원(園)·묘(墓)에 묻는 장방형(長方形) 모양의 묘지석(墓誌石).
개설
지석은 죽은 사람의 이름, 출생과 사망 연월일, 일생의 행적, 가족관계, 묘지의 좌향 등을 기록해 무덤 앞에 묻는 기록물이다. 재료는 금속판·돌·벽돌·도판 등이 사용되지만 왕실에서는 돌을 사용하였다. 고려·조선시대에 많이 성행하여 왕실은 물론 사대부 가문에서도 거의 지석을 만들었다. 고려에서는 널이나 유골함에 직접 새긴 경우도 있다. 지석을 묻는 이유는 후손들에 의해 실전(失傳)될 경우를 대비하고, 피장자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서였다.
내용 및 특징
왕실에서 사용하는 지석은 대부분 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묘호(廟號)+능호(陵號)+지석(誌石)’을 쓰는 것이 관례이고, 다른 1장은 지문(誌文)을 새겼다. 지석의 규모는 경종의 비인 단의왕후(端懿王后)의 경우 조례기척(造禮器尺; 28.621㎝)으로 길이 4척 2촌 4푼, 너비 2척 9촌 5푼, 두께 5촌 9푼으로 상당한 크기의 돌을 사용하였다(『숙종실록』 44년 2월 17일).
지석 묻을 자리는 5척 깊이로 파서 모래, 황토, 생석회의 삼물(三物)을 사용하여 1척 5촌 두께로 다지고 지석을 놓는다. 지석은 내면 사변(四邊)에 유회(油灰)를 발라서 자획(字畫)을 보호하고, 개석(蓋石)을 합친 후 유회로 틈을 메워 동철(銅鐵)로 묶는다. 그 위에 다시 삼물을 1척 5촌 두께로 견고하게 쌓은 후 본토(本土)로 마감한다. 왕릉의 지석은 봉분 남쪽 난간석과 석상(石床) 북쪽의 빈 공간에 묻었다.
지석은 한번 묻고 나면 이장(移葬)하지 않는 한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지문(誌文)의 저술과 제조 과정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왕으로 추숭하는 경우에 지석을 개서(改書)하는 문제가 있었으나 역시 천릉(遷陵)하기 전에 고쳐지지 않았다. 왕릉을 옮길 경우 처음 묻었던 지석을 구지(舊誌)라고 표시하여 신릉(新陵) 밑에다 봉안하고, 그 위에 새로운 지석을 봉안하였다.
변천
지석으로 쓸 돌은 지석감조관(誌石監造官)을 두어 충주에서 채석해 왔으며, 후기에는 강화도의 돌을 사용하였다. 1673년(현종 14) 영릉(寧陵)을 천장하면서 재신(宰臣)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현종에 의해 백자지석(白磁誌石)을 처음으로 만들어 돌로 만든 것과 함께 묻었으나 이어지지 않았다. 백자지석이 다시 등장하게 되는 것은 영조 때였다. 1753년(영조 30) 영조는 비용이 절감되고, 매우 간편하다며 백자지석을 사용하도록 지시하며, 『국조상례보편』에 실었다.
백자지석 1장(張)의 규모는 조례기척으로 길이 8촌 8푼, 너비 6촌 8푼, 두께 7푼이다. 지문의 글자 수에 따라 여러 장으로 제작되는데, 각 장의 글자는 8행(行) 18자(字)로 이루어진다. 초벌구이 상태에서 각 장마다 회회청(回回靑)으로 오른편 모서리에 몇 번째 장인지를 쓰고, 왼편 모서리에는 능호와 시호를 쓴다. 하단 모서리에는 모두 몇 장인지를 쓰고 재벌구이 한 후 지석으로 사용하는데 지석함(誌石函)에 넣고 함 상면에 묘호와 능호 등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1800년(순조 즉위) 정조의 국장에는 백자 지석 대신 오석(烏石)을 사용하였다. 정조는 백자지석이 지나치게 화려하고 사치스럽다고 여겨 백성들에게 절검(節儉)하는 뜻을 보이기 위해 백자지석을 금하였던 것이다. 그 후 1805년(순조 5) 정순왕후(貞純王后)의 국장과 1897년(광무 1) 홍릉(洪陵) 천장에서 백자지석을 사용하였을 뿐 대부분 오석으로 만든 지석을 사용하였다.
의의
비가 분묘 곁에 세워져 피장자를 밝히는 역할을 하였다면 묘지는 지하에 묻어 비석이 인멸되거나 봉분을 일실(逸失)하였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왕릉에서 쓸 지석은 충주와 강화도에서 생산하였으나 점점 채석이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왕실에서는 사대부가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백자지석을 채용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오석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검소한 상장례를 모색하던 왕실의 노력이 반영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