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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0:5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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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갑주 |
한글표제 | 갑주 |
한자표제 | 甲胄 |
하위어 | 경번갑(鏡幡甲), 단갑(鍛甲), 두정갑(頭釘甲), 두정미갑(頭丁味甲), 등두구(籐頭口), 면갑(綿甲), 삼승갑(三升甲), 쇄자갑(鏁子甲), 수은갑(水銀甲), 엄심갑(掩心甲), 유엽갑(柳葉甲), 전갑(氈甲), 지갑(紙甲), 철답(鐵甲), 철주(鐵冑), 피주(皮冑) |
관련어 | 갑옷[甲], 투구[冑] |
분야 | 생활·풍속/의생활/의복 |
유형 | 의복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최은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갑주(甲胄)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32년 4월 9일 |
전투, 훈련, 의식의 상황에서 착용하는 갑옷과 투구.
개설
갑주는 신체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으로 착용하기 시작하여 시대가 내려올수록 장식적·사회적·상징적 기능이 부가되었다.
조선시대 갑주의 명칭은 『만기요람(萬機要覽)』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에서 보면 색·신분·재료·갑주 부위의 순서로 명명한다. 그리고 2가지 이상의 복합재료일 경우에는 의(衣)의 재료, 갑찰(甲札)의 순서로 기록한다. 조선시대 갑옷의 종류는 철갑(鐵甲)·피갑(皮甲)·지갑(紙甲)·엄심갑(掩心甲)·단갑(鍛甲)·전갑(氈甲)·삼승갑(三升甲)·목면갑(木綿甲)·쇄자갑(鏁子甲)·경번갑(鏡幡甲)·두정갑(頭釘甲)·두정미갑(頭丁味甲)·두석린갑(豆錫鱗甲) 등으로 나누고, 투구는 철주(鐵冑)·피주(皮冑)·엄심주(掩心冑)·백주(帛冑)와 단주(緞冑)의 비단 투구·전주(氈冑)·삼승주(三升冑)·목면주(木綿冑)·등두구(籐頭口)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단갑(鍛甲)과 전갑(氈甲)은 주로 고위 장수급의 갑옷이었던 데 비해 지갑(紙甲)·엄심갑(掩心甲)·삼승갑(三升甲)·면갑(綿甲)은 일반 병졸들의 갑옷으로 추정된다.
갑옷[甲]은 보호하는 신체 부위에 따라 갑신(甲身), 갑군(甲裙), 피박(披膊), 호액(護腋), 골미(鶻尾), 비갑(臂甲), 호갑(護甲)으로 이루어져 있고, 투구[冑]는 감투, 정수리 장식, 드림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 갑주의 안감은 대부분 청색으로 음양오행과 관련이 있고, 갑옷의 안쪽에는 저고리와 바지·협수·괘자의 군복을 갖추어 입었고, 쇄자갑의 안쪽에는 피삼을 입기도 하였다. 갑주의 대는 전대를 비롯하여 포백대·혁대·사대 등 다양한 종류와 방식이 사용되었다.
갑옷은 호항(護項) 분리형·소매 분리형·의상(衣裳)형·포(袍)형의 4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며, 투구는 원주(圓冑)형·첨주(簷冑)형·드림 분리형의 3가지가 있다. 시대에 따른 갑옷과 투구의 조합 양상이 각기 다른데, 가장 빈번히 보이는 조합 형식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갑주인 포형 갑옷에 드림 분리형 투구이다.
갑주는 국가의 주관하에 특정 기관을 두어 체계적으로 제조, 관리하던 품목이다. 조선시대 중앙의 갑주 제조 및 보수 관리는 군기감(軍器監) 또는 군기시(軍器寺)에서 담당하였으며, 시대적 요청에 따라 정음청(正音廳)과 상의원(尙衣院) 또는 비융사(備戎司)에서 담당하였다. 군기감 산하에는 수많은 장인들이 배속되어 관영수공업 형태로 갑주를 제조하였으며, 한 달을 기한으로 무기를 제조하여 수량을 회계하는 월과갑주제(月課甲冑制)로 운영하였다. 한편 지방의 갑주 제조는 군기감에서 제작된 양식에 의하여 생산함으로써 표준화를 지향하였으며, 도 단위로 갑주를 제조하게 하여 공납을 받는 진상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진상 방식은 명일에 바치는 방물갑주제(方物甲冑制)와 매월마다 일정량을 부과받아 바치는 월과갑주제로 나뉘었다. 또한 국가적 비용을 절감하고 백성의 저항을 줄이고자 각 도의 군정들에게 모두 개인적으로 갑주를 마련하게 하는 갑주자비제(甲冑自備制)를 실시하여 갑주를 충당하기도 하였다. 국초에 헌물을 제작하여 바치게 하는 방물갑주제는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후대로 내려와 갑주의 중요성이 감소하는 가운데 진휼이나 공사 비용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일이 잦아지다가 마침내 고종대에 철폐되었다.
연원 및 변천
갑주는 외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가죽이나 나무판자·나뭇가지를 엮은 것·뼈 등을 가지고 몸체나 하각부에 대면서 발달되었을 것이다. 차츰 금속문화가 발달하고, 기원전 3000년 전부터는 청동·철제로 만든 복식 자료와 무기들이 출토되고 있어 이때부터 이미 갑주를 착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갑옷은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나타난 갑장(甲匠) 배치 현황에서 나타나는데, 일본의 침범이 잦았던 경상도·전라도에 이들의 배치가 많은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 많은 양의 갑옷이 소모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갑옷은 관청에서만 갖추었던 것이 아니라 일반 사가에서도 유사시에 대비한 필수품으로 소유하였고, 가난하여 스스로 준비하지 못하는 자는 관청에서 궁시와 갑옷을 나누어 주었다. 조선시대는 화포와 총통이 사용되고 개인의 기술보다는 전투대형에 의존하는 장병전술로 훈련된 포수를 주로 하고 보병이 보조하는 전술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전술은 갑주에 변화를 가져와 경첩한 두정철갑이나 두정피갑은 다시 포제 갑옷인 두정갑·철릭·구군복·호의(더그레)·쾌자로 변천하였다. 갑옷의 색은 주로 홍색이 사용되고, 청색·황색 등도 간혹 나타난다. 중국의 유상제 갑주는 조선말기까지 왕릉에 세워진 무인석상에서 볼 수 있고, 무예복에서 간혹 보여서 갑주의 이중구조를 이룬다.
1895년(고종 32) 칙령 78호의 육군복장규칙이 반포되면서 서구식 군복을 입게 되었다(『고종실록』 32년 4월 9일). 이때의 군복은 정치적 군사제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외세의 판도에 따라 청·일본·러시아·미국의 군복을 착용하였다. 그러나 자주적 의지를 보여 주어 전통적인 구군복을 착용하거나 새로운 서양식 군복을 제작하여 착용하기도 하고 열강의 군복을 채택하여 착용할 때에도 그들이 착용하는 군복의 형태와 다르게 하거나 태극문·무궁화문·배꽃문·전문 등을 넣어 주체의식을 강조하였다.
상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갑주는 무기와 전술과의 상관관계에 따라 기능적으로 변천된 소산이며, 근대 이후 현대의 갑주는 군사제도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변천 발전되었다. 갑주는 각 시대적 배경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사건들을 계기로 변화하였다.
형태
문헌에 나타난 갑주의 종류는 도금동엽갑주(塗金銅葉甲冑)·피갑주(皮甲冑)·사사을갑주(沙士乙甲冑)·철갑주(鐵甲冑)·두석린갑주(豆錫鱗甲冑)·두정갑(頭釘甲)·경번갑(鏡幡甲)·수은갑(水銀甲)·유엽갑(柳葉甲)·지갑(紙甲)·면갑(綿甲)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현전하는 유물 중 두석린갑주·두정갑·피갑·면갑·흉갑에 대해서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두석린갑주(豆錫鱗甲冑): 두석이란 놋쇠로 두석의 비늘을 연결하여 만든 갑옷이며, 고려대학교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의 특징은 둥글게 파진 깃이 가슴 정중에서 합임(合衽)하는 포형으로, 양옆과 뒷중심선의 허리 아래 부분이 트였으며 트임 부분에 모두 털을 대었다. 재질은 겉감은 붉은색 모직[紅氈]이고, 속에는 무명을 심감으로 대었으며, 안감은 명주이다. 황·적·흑색의 두석린은 소매의 상박(上膊)과 복부까지만 부착하였고, 나머지 부분에는 작은 원두정을 박았으며, 하단에는 보문(寶紋)을 놋쇠로 만들어 장식하였다. 한편 투구는 흑색 피혁으로 사주(四柱)에는 놋쇠로 융기쌍조(隆起雙條)를 이루고 있다. 전후에는 봉황이 날아드는 형상을 새겼다. 정개에는 삼지창을 위시하여 보주, 주락에 이어 한주가 개철에서 마무리 짓고 챙은 역시 놋쇠로 반월형이나 앞에는 칠릉(七稜)이고 안에는 용을 투조하였고 챙 밑으로 이마가리개를 만들어 정중에 원수의 표시를 하였으며, 목가리개는 좌우와 후면으로 드리웠다.
두정갑(頭釘甲):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봉상(李鳳祥) 장군의 갑옷을 살펴보면, 형태의 특징은 둥글게 파진 깃이 가슴 정중에서 합임(合衽)하는 포형으로, 길이는 116㎝정도이고 양옆과 뒷중심선의 허리 아래 부분이 터져 있다. 겉감은 붉은색 모직이고, 속은 무명 3겹을 누볐으며, 안감은 하늘색 공단이다. 두정은 겉에서 안으로, 안에는 5×6㎝ 정도의 얇은 방형(方形) 철미늘을 두정과 연결하여 공그르고 의령 주위에는 택사(澤瀉) 장식을 하였다. 어깨에는 견철을 대고 가슴 정중에는 의령에 이어 끈으로 매게 하였다. 투구는 위는 좁고 아래로 퍼진 형인데 사주에는 놋쇠로 융기쌍조를 세워 그 앞에는 용을, 뒤에는 봉을 각각 조각하여 좌우에 첨부하였다. 챙은 손상되었으나 그 밑 이마가리개에는 좌우에서 정중의 원수 글자를 향하여 비룡이 날아드는 형상이 새겨져 있다. 정개의 장식과 목가리개는 손상되어 흔적도 없다. 또한 부원수용 갑옷은 원수용과 별 차이 없으나 투구는 사주 안에 용과 봉이 없고 이마 정중에 ‘副(부)’ 자와 그 좌우에 운룡이 명시되었다.
피갑(皮甲): 피갑은 물소가죽이나 코뿔소 가죽을 사용하는데, 이는 겉가죽 뒤에 붙은 살을 모두 도려내고 겉가죽만을 사용한다. 육군박물관 소장품을 보면, 형태의 특징은 얇고 둥글게 파인 깃에 합임이며, 소매가 직배래인 포형으로 양옆과 배래가 완전히 트여서 놋쇠단추로 여미게 되어 있다. 겉감은 면(綿) 직물이며, 속은 무명을 2겹 대었고 그 귀에 9.5×6.5㎝ 크기의 가죽제 미늘을 연결시켰다. 깃 주위에는 백색 가죽을, 앞솔기는 무명으로 마무리하였고, 어깨에는 놋쇠견철을 대었다.
면갑(綿甲): 육군박물관에 1점 소장되어 있다. 형태의 특징은 총길이가 85㎝로 엉덩이 정도까지 오는 길이이다. 네모난 깃에 양옆이 트인 배자 형식이고, 양 겨드랑이 부분을 깊게 파서 활동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어깨의 좌측이 터져 있어 매듭단추를 달아 입고 벗게 되어 있고, 양쪽 옆트임에는 좌우에 각각 두 개씩 끈을 달아 앞뒤에서 매게 되어 있다. 앞판의 좌우와 뒤판의 상하 좌우에는 흑색으로 글자와 식물문이 있다.
흉갑(胸甲): 육군박물관과 고려대학교박물관에 1점씩 소장하고 있다. 육군박물관 소장품을 보면 총길이 59㎝로 허리 정도까지 오는 길이이다. 겉감은 검정색 면직물이고, 속은 무명에 두껍게 솜을 두었다. 전체적인 형태는 양복 조끼와 유사하며, 앞면에는 두꺼운 철판을 대고 뒤판에는 무명 속에 10.8×2.4㎝, 10.8×4.9㎝의 철판을 연결하였는데 앞판은 속에 무명안과 앞면 철판을 고정하느라 그 주위에 광두정(廣頭釘)을 시정(施釘)하였다. 그리고 가슴 정중에 여미는 장식은 놋쇠로 만들어 첨부하였다.
용도
갑주는 전투나 훈련, 그리고 의식 등에서 주로 착용되었다. 즉 외침이나 내란을 비롯해 강무나 습진(習陣), 대열 등 주요 훈련에서 착용되었다. 또한 군례나 국왕의 거둥 시에 갖추어지는 노부(鹵簿)나 행행(行幸) 등의 상황에서도 착용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왕세자의 가례에는 갑주가 보이지 않지만 왕의 가례에는 갑주가 착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의식에 사용되는 갑주의 상징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갑주가 왕실과 국가 전례의 위상을 드러내는 한 수단이었음도 알 수 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문헌에 나타난 도금동엽갑주·피갑주·사사을갑주·철갑주·두석린갑주·두정갑·경번갑·수은갑·유엽갑·지갑·면갑 등의 갑옷의 명칭은 갑옷의 재료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대개 비단(緋緞)과 철(鐵)·두석(豆錫)·무명·전(氈)·종이[紙]를 사용하였는데, 『세종실록』 「오례」 병기조에 나타난 갑옷 제작법을 보면, 수은갑은 쇠로 미늘을 만들고 수은으로 끼얹어 붉은 가죽끈을 사용하여 엮어 만든 것이고, 유엽갑은 그을린 녹비를 사용하여 엮어 만들고 검은 칠을 하였으며, 피갑(皮甲)은 생저피로 미늘을 만들고 그을린 녹피를 사용하여 엮어 만들었다. 또한 쇄자갑은 철사로 작은 고리를 만들어 서로 꿰었고, 경번갑은 쇠미늘과 쇠고리를 서로 사이하여 엮어 만든 것이다. 두정갑은 철편과 함께 푸른색 옷이나 붉은색 옷에 둥근점무늬 장식물을 박은 것으로, 분리된 소매를 끈으로 매게 되어 있고 소매 역시 장식 못을 박았으며, 사슴 가죽으로 가장자리를 대기도 하였다. 지갑은 종이를 접어서 미늘을 만들고 녹피로 엮어 만들어 검은 칠을 하며, 뒤의 길이가 짧고 소매가 좁은 갑저고리를 두꺼운 종이로 소금물에 4~5회 적셔 만든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김순규 외, 『한국의 군복식발달사 I』, 국방군사연구소, 1997.
- 김정자, 『한국군복의 변천사연구』, 민속원, 1997.
-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韓國의 甲冑』, 1987.
- 박가영, 「조선시대의 갑주」,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 이강칠, 「갑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이강칠, 「韓國의 甲冑小考-豆錫鱗甲을 中心으로-」, 『考古美術』第136-137號,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