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어새(皇帝御璽)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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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황제어새 |
한글표제 | 황제어새 |
한자표제 | 皇帝御璽 |
상위어 | 국새(國璽), 새보(璽寶), 인장(印章) |
관련어 | 군주어새(君主御璽), 대한국새(大韓國璽), 수명새(受命璽), 전국새(傳國璽), 친서(親書), 황제지보(皇帝之寶), 황제지새(皇帝之璽) |
분야 | 교육·출판/출판/인장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대한제국 |
왕대 | 고종 |
집필자 | 성인근 |
용도 | 친서(親書) |
재질 | 금은 합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황제어새(皇帝御璽) |
대한제국 시기 고종이 비밀 외교를 위해 친서(親書)에 사용한 국새.
개설
2009년 3월 잃어버렸던 고종의 국새를 되찾았다는 기사가 연일 신문 지상에 발표되었다. 한 재미 교포가 소장하고 있던 유물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낮은 가격에 인수하였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고종의 비밀 국새인 ‘황제어새(皇帝御璽)’였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유리 원판 필름에 담긴 실물의 모습과 당시 사용된 문서 사진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던 국새가 국내에 들어온 것이다. 조선시대를 비롯하여 대한제국 때까지 우리 국새의 실물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은 현재 이 유물의 출현은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연원 및 변천
대한제국은 1897년(광무 1) 10월 12일부터 1910년(융희 4) 8월 29일까지 약 13년간 주권을 행사하였다. 19세기 말 세계적 격변기에 자주 독립을 열망하는 한민족의 소망을 담고 출범한 것이다. 비록 제국주의가 만연한 시기에 여러 약소국들과 마찬가지로 국권을 잃었지만, 중국 중심의 화이 체제에서 오늘날의 세계 체제로 변모하는 과도기에 엄존했던 국가였다.
1897년(광무 1)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직후 고종의 황제 즉위를 요청하는 상소가 조야 각계에서 쇄도하였다. 그해 8월에는 지난해에 일본의 위압으로 정해졌던 건양(建陽)이란 연호를 광무(光武)로 변경하였고, 10월 초 서울의 회현방(소공동)에 환구단(圜丘壇)이 완공되자 마침내 그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고종은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다음 날 국명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어 제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505년간 지속된 조선 왕조는 종언을 고하였고, 우리 역사상 최초로 황제의 나라인 대한제국이 탄생하였다.
대한제국 선포의 핵심은 군주의 존호를 ‘황제’로, 국호를 ‘대한’으로 정한 일이다. 국호를 대한으로 정한 이유는 우리나라가 마한·진한·변한 등 원래의 삼한을 아우른 것이니 ‘큰 한[大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며, 조선은 옛날에 기자가 봉해진 때의 이름이니 당당한 제국의 명칭으로 합당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황제국에 걸맞은 새로운 새보(璽寶)를 제작하였다. 이때 제작한 국새와 어보는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3과), 칙명지보(勅命之寶, 2과),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命之寶)로 총 9과이다.
황제어새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던 대한제국 때에 제작한 고종황제의 비밀 국새이다. 고종은 세계 각국에 일본의 만행을 드러내고 대한제국의 지지를 요청하는 친서에 주로 이 국새를 사용하였다. 황제어새가 찍힌 친서는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 원판 필름으로 주로 남아 있고, 일부 원본이 남은 사례가 있다. 유리 원판 필름에 담긴 친서는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가 1927년 5월부터 1935년 9월까지 한반도와 일본, 만주 지방에 흩어져 있던 사료를 수집하여 촬영할 때 함께 찍은 것으로, 국사편찬위원회 설립과 더불어 이곳에 보관되어 오늘에 이른다.
황제어새가 찍힌 고종의 친서는 1900년(광무 4)부터 1909년(융희 3)까지 약 10년에 걸친 시기의 것으로, 모두 18건이 발견되었다. 한편 2009년 3월에 발견된 국새 외에도 또 하나의 황제어새가 존재했음을 남겨진 친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황제어새는 1905년(광무 9)부터 1908년(융희 2) 사이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형태
대한제국 때의 새보는 모두 13과로 3과는 옥(玉)이고, 나머지 10과는 금속성 물질로 제작되었다. 당시 새보의 제작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대례의궤(大禮儀軌)』에는 10과에 소요된 금속은 천은(天銀) 35근(斤), 황금 41근 12냥(兩)으로 뭉뚱그려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어느 인장에 어느 정도 비율로 금과 은이 섞였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금과 은을 주성분으로 하여 제작하였음은 분명하다. 각 인장마다 부수적으로 소요되는 금속은 도황금(鍍黃金) 4전(錢), 수은(水銀) 1냥 9전, 땜황금[汗音黃金] 1전이다. 도황금은 용어 그대로 인장을 제작한 이후 도금을 위한 금이며, 수은은 인장 자체의 성분에 포함되었으리라 여겨진다.
눈여겨봐야 할 물질은 땜황금이다. 『대례의궤』에는 ‘땜’이 ‘한음(汗音)’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순수한 우리말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므로 땜으로 읽는다. 땜이란 주로 금이 가거나 뚫어진 곳을 때우는 것과, 쇠붙이 등을 접합시키는 일이란 뜻의 우리말이다. 따라서 『대례의궤』에 기록된 땜황금 1전은 바로 인뉴와 인대를 접합시키기 위한 용도의 황금인 셈이다.
접합 방식을 보면, 우선 인뉴 부분과 인대 부분을 따로 조각하여 주물을 통하여 완성한다. 그리고 인대의 위, 인뉴의 아래에 얇은 종이판과 같은 땜황금을 깔고 가마에 다시 넣는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인대와 인뉴가 녹지 않고, 땜황금만 녹는 적정한 온도를 찾아 굽는 일이다. 인뉴와 인대는 이미 금과 은의 합금이므로 열에 녹는 온도가 황금보다 높다. 따라서 땜황금이 녹는 시점에서 인뉴와 인대가 자연스럽게 붙게 되는 것이다.
고종의 황제어새 또한 이러한 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으리라 여겨진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약 20년 전인 1876년(고종 13) 겨울, 궁궐에 있는 새보를 새로 제조하고 수리한 기록에서도 땜 방법을 사용하였던 내용이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이러한 접합 방식은 조선시대 새보 제작의 일반적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황제어새의 제작 표준에 대해서는 문헌 기록이 없어 확증할 수 없지만 명나라의 새보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인문(印文)의 서체나 글자를 대하는 인식에서는 매우 비슷한 동질감이 있다. 따라서 명나라 새보의 전형을 본받아 제작하였으리라 여겨진다. 대한제국의 여러 새보와 황제어새의 인문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새보에 쓰인 서체의 표준은 명과 청의 그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과 대한제국이 겪고 인식한 황제국의 표본은 역시 중국 대륙이었고, 중국의 전형을 도입한 것은 당시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다고 할 수 있다.
황제어새의 유식(鈕式)은 귀뉴(龜紐)이다. 인문에 ‘황제(皇帝)’와, 천자의 인장 용어인 ‘새(璽)’를 쓰고 유식만은 제후국 시절인 조선시대 내내 사용하던 거북을 얹은 이유 또한 문헌 기록이 없어 단정할 수 없는 숙제이다. 다만 이미 유식에 대해 청나라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는 시기에 제작되었으므로 청을 의식한 처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황제어새가 대한제국의 공식 국새가 아닌 비밀 국새였으므로 유식 자체가 국가적으로 공식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대한제국의 공식 국새인 ‘대한국새(大韓國璽)’처럼 야무지게 서려 넣은 다섯 개의 발톱에서 황제국의 위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또한 거북 등 껍데기의 연속된 무늬는 장구(長久)와 연면(連綿)을 나타내므로,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 황실의 장구한 연속성을 유식에 담아 염원하였다고 풀이된다.
되돌아온 국새는 외함인 보록(寶盝)이 분실된 상태였고 보통(寶筒)이라 일컫는 내함 속에 들어 있었다. 국새의 전체 높이는 4.8㎝, 무게는 794g이었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기 국새가 약 10㎝이니 반 정도 크기이다. 인뉴(印鈕)는 귀뉴(龜紐)이고,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에 횡혈(橫穴)이 있으며, 비단실로 짠 인수(印綬)가 매달려 있다.
정방형의 인면에는 주문(朱文)으로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어(御)’ 자의 아래 두 군데와 ‘제(帝)’ 자의 중간에는 언제 뚫렸는지 모를 공혈(孔穴)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성분을 분석한 결과 금과 은의 비율이 인뉴는 81.4:18인 반면, 인대(印臺)는 57:41로 나타나 손잡이와 몸체를 따로 제작해 붙인 것으로 밝혀졌다. 전체적으로는 금이 은의 약 2.3배인 셈이다.
보통의 재질은 황동(黃銅)이었고 2단으로 제작되었다. 하단에는 인니(印泥)를 넣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상단에는 국새를 넣었다. 뚜껑은 네 면을 경사지게 꺾어 마무리하였다. 하단과 뚜껑 내부는 붉은 명주 천을 직접 접착해 마무리했으나 국새가 들어가는 상단은 두께 0.5㎝의 소나무로 내곽을 만든 뒤 붉은 천을 붙여 마감했다. 문화재청은 황제어새를 보물 제1618호로 지정하였다.
참고문헌
- 『대례의궤(大禮儀軌)』
- 『대한예전(大韓禮典)』
- 『이조새보인압부신제(李朝璽寶印押符信制)』
- 국립고궁박물관, 『고종 황제어새』, 2009.
- 김양동, 『한국의 인장』, 국립민속박물관, 1987.
- 尾崎雄二郞 編, 『說文解字注』金冊, 東海大學出版會,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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