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사(僞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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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조선의 왜인 통제책을 위반하면서 도항한 왜인.

개설

조선전기 대일 정책의 핵심은 왜구의 금압(禁壓)과 통교왜인(通交倭人)에 대한 통제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왜구 문제는 고려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만큼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해양 방어를 충실히 하는 한편, 외교적인 노력과 왜구에 대한 회유책을 실시하여, 1409년(태종 9)을 전후하여 왜구의 침입이 크게 줄어들었고, 1419년(세종 1)에는 왜구의 소굴로 인식되었던 대마도를 무력으로 정벌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조선 정부의 노력으로 왜구의 침입은 크게 줄어든 반면 일본에서 오는 통교자는 늘어났다. 이에 조선에서는 왜인들이 정박하는 포소(浦所)를 제한하는 한편, 서계(書契)·도서(圖書)·문인(文引)과 세견선의 정약(定約) 등 왜인 통제책을 실시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왜인 통제책을 여러 가지 교묘한 방법으로 위반하면서 도항하는 왜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을 일반적으로 위사(僞使)라고 칭하였다.

내용 및 특징

왜인 통제책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위사, 즉 통교 위반자의 유형을 살펴보면, 먼저 도항 증명서인 서계·도서·문인을 위조 또는 변조하거나 다른 사람의 것을 소지한 사례, 서계·도서·문인을 소지하지 않고 도항한 사례, 서계에 기록되지 않은 물건을 사적으로 진헌(進獻)한 사례, 사적인 도서나 죽은 자의 도서를 사용한 사례, 기한이 지난 문인을 사용한 사례 등이 있었다.

그리고 정약한 수 이외의 세견선을 중첩해서 보내는 사례, 세견선을 정약하지 않고 도항한 사례 등 세견선과 관련된 위반자도 많으며, 제3자가 다른 사람의 명의를 빌리거나 도용해서 도항하기도 하였다. 특히 대마도에서 심처왜(深處倭)와 왕성대신(王城大臣), 유구국왕, 일본국왕 등의 사절을 사칭하여 파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밖에도 처음으로 통교하거나 통교가 단절되었다가 다시 통교한 사례, 일본국왕의 명을 칭탁하거나 사절·격군(格軍) 등을 칭탁한 사례, 수직왜인(受職倭人)이 사송선을 파견한 사례 등이 확인된다. 특히 응인(應仁)의 난 이후 일본 국내 정세가 혼란한 틈을 타서 일본국왕 사절을 사칭한 위반자가 많았다.

위사는 15세기 초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대마도의 위사가 많았지만 1470년(성종 1) 이후는 박다상인(博多商人)이 대마도의 위사 파견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조선에서는 1443년(세종 25)의 계해약조와 1512년(중종 7)의 임신약조, 1547년(명종 2)의 정미약조 등을 통해서 대마도주 및 일본 각 지역의 왜인들의 통교를 제한하였다.

이에 대마도주는 줄어든 세견선의 수를 복구하기 위하여 소이전사(小二殿使)나 일본국왕사를 사칭하여 조선과 외교적인 교섭을 하였다. 그와 더불어서 폐지되었던 일본 각 지역의 통교권을 부활하여 원래의 명의자에게 통교권을 돌려주지 않고 자신이 사용하였으며, 통교권의 확대를 위하여 대마도의 여러 세력을 비롯한 심처왜·왕성대신·유구국왕·일본국왕 등 다양한 명의의 사절이 새롭게 창출되었다.

조선 정부는 조선의 왜인 통제책을 위반하면서 도항하는 통교 위반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경우에는 가지고 온 물품의 진헌을 금지하고 숙배(肅拜)를 거부하였으며, 접대를 허락하지 않고 과해량(過海糧)을 주어 되돌려 보냈다. 그러나 통교 위반자의 위반 수법이 다양하고 교묘하였기 때문에 위반 사실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통교 위반자로 의심이 되더라도 되돌려 보내지 않고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접대를 허용하였다. 심지어 위반 사실이 거의 명백하게 드러난 경우에도 처벌하지 않고 상경시켜 접대하기도 하였다.

조선 정부가 이처럼 통교 위반자를 강력하게 단속하지 못하고 미온적으로 처리한 이유는 멀리서 온 사절을 박대할 수 없다는 명분론과 일본과의 불화 및 왜구의 재발 가능성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그들이 서계·도서·문인을 소지하고, 진상(進上)·회사(回賜)라는 외교 의례에 충족된다면 통교 위반자의 진위 여부에 대하여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듯하다. 조선에서는 통교 위반자가 많이 나타나자 그에 대한 처리를 대마도주와 의논하거나 위반 사실을 대마도주에게 통보하기도 하였다. 이는 통교 위반자를 처벌하는 것보다는 대마도주로 하여금 문인 발행에 신중을 기하도록 경고하려는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이같이 조선 정부가 대마도주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통교왜인을 통제하려는 방식은 한계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대마도주에게 문인 발행권을 주어 통교자를 통제하려 하였지만 대마도주가 제대로 문인을 발행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간접 통제 방식과 문인제도의 한계점이 통교 위반자를 증가시키는 배경의 한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변천

외교문서를 위조 또는 변조하거나 다른 사람의 명의를 빌려서 통교하는 현상은 임진왜란 이후 국교의 회복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당시 대마도주와 대마도의 유력 세력인 유천씨(柳川氏)는 30여 년 동안 열 차례에 걸쳐 막부(幕府)의 장군이 조선의 왕에게 보내는 국서와 조선의 왕이 막부의 장군에게 보내는 답서를 중간에서 개작하였다. 유천 사건이라 불리는 이 국서 개작 사건은 1633년(인조 11) 유천조흥(柳川調興)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유천 사건을 계기로 대마도에서 조직적으로 행해지던 국서 개작은 1635년(인조 13) 이후 한일 관계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또한 막부는 교토 오산(五山)의 승려들을 대마도 이정암(以酊庵)에 파견하여 2년씩 윤번으로 근무하면서 외교문서 작성 및 검열을 담당하게 하는 이정암윤번제(以酊庵輪番制)를 시행함으로써 막부가 대 조선 외교에 간여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였다.

의의

조선전기에 왜인 통제책을 교묘한 방법으로 위반하고 도항한 위사는 조일 간의 외교 사상 매우 보기 드문 현상일 뿐만 아니라 당시 조일 관계의 특수한 단면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위사는 조선시대 대일 외교의 성격과 특징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주제 가운데(중) 하나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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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례집요(邊例集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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