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복흥(宋復興)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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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송복흥 |
한글표제 | 송복흥 |
한자표제 | 宋復興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명종~선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무선(武先) |
호 | 곡봉(鵠峰)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27년(중종22) |
사망 | 1594년(선조27) |
본관 | 여산(礪山) |
주거지 | 개성(開城) |
묘소소재지 | 전라도 고부군(古阜郡) 천곡산(泉谷山) |
증조부 | 송호(宋瑚) |
조부 | 송승은(宋承殷) |
부 | 송전(宋琠) |
모_외조 | 안동전씨(安東全氏): 전숙(全淑)의 딸 |
처_장인 |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승석(金承碩)의 딸, 김방경(金方慶)의 후손 |
자녀 | (1자)송상현(宋象賢) (2자)송상인(宋象仁) (1녀)장언오(張彦悟)의 처 (2녀)한효상(韓孝祥)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송복흥(宋復興) |
총론
[1527년(중종22)∼1594년(선조27) = 68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무선(武先), 호는 곡봉(鵠峰)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주거지는 황해도 개성(開城)인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라도 고부군(古阜郡)에 피난하여 이곳에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송전(宋琠)이고, 어머니 안동전씨(安東全氏)는 부장(部將)전숙(全淑)의 딸이다.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있다가 순절한 송상현(宋象賢)의 아버지이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1552년(명종7)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에 계속하여 문과에 번번이 낙방하였다. 만년에 생계가 어려워져서 노쇠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음보(蔭補)로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이 되었고, 뒤이어 종부시(宗簿寺)주부(主簿)를 지냈다. 많은 명사(名士)들과 교유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추천으로 양지현감(陽智縣監) · 용안현감(龍安縣監) · 평강현감(平康縣監)을 지내고,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90년(선조23) 송화현감(松禾縣監)으로 재직 중에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병중의 어머니를 구료하기 위하여 사직하고 고향 개성으로 돌아갔다.
1592년(선조25)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때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있던 맏아들 송상현(宋象賢)이 부채 하나를 보내왔다. 부채 위에 쓴 아들의 시에 “달무리처럼 포위당한 외로운 성에[孤城月暈], 대진(大鎭)의 구원병은 오지 않는데[大鎭不救], 군신(君臣)의 의리는 중하고[君臣義重], 부자(父子)의 은혜는 가벼워라[父子恩輕].”라는 글을 보고 미리 아들의 죽음을 직감하였다. 바다를 건너온 왜적과 싸우다가 아들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다가, 남은 가족들을 데리고 왜구가 침입하지 않은 전라도 고부군(古阜郡)으로 피난하였다. 아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또 전란을 피해 도망하느라고 피로가 겹쳐서, 병석에 누운 지 3년 만에 1594년(선조27) 전쟁 중에 타향에서 죽으니, 나이가 68세였다.
일화
송복흥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박씨(朴氏) 손에 양육되었다. 학문에 힘써 여러 번 향시(鄕試)에 장원하였다. 1552년(명종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 이때부터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번번이 급제하지 못하였다. 한때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음보(蔭補)로 말직 벼슬을 하다가, 명사(名士)들의 추천으로 현감(縣監)과 사헌부 감찰(監察)까지 역임하였다. 맏아들 송상현은 1576년(선조9) 병자년 별시 문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현감으로 재임하면서 틈틈이 과거시험을 준비하여, 1596년(선조23) 경인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64세였다. 다른 선비들은 과거에 몇 번 실패하면, 아예 과거를 포기하고 출세 따위를 멀리 하며 오로지 순수 학문만을 하는 ‘유일(遺逸)’이라고 자처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하고 죽기 4년 전에 급제하였는데, 이는 당시 과거를 등용문(登龍門)으로 삼던 관료주의 사회에서 선비들이 얼마나 과거 합격에 집착하였던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고부군 동쪽 천곡산(泉谷山)의 언덕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되었다. 계곡(溪谷)장유(張維)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계곡집(谿谷集)』 권12)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충의위(忠義衛) 김승석(金承碩)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두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장남 송상현은 동래부사로 있다가 <임진왜란> 때 순절하였고, 차남 송상인(宋象仁)은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냈다. 손자 송인급(宋仁及)도 급제하여 예조 정랑을 지냈다. 송상현이 원종공신으로 책훈될 때 아버지 송복흥도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곡집(谿谷集)』
- 『죽천집(竹川集)』
- 『지봉집(芝峯集)』
- 『월사집(月沙集)』
- 『백주집(白洲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