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창역(大昌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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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원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평릉도에 속한 역.

개설

대창역(大昌驛)은 고려시대에는 양계(兩界) 가운데 동계(東界) 지역의 역도(驛道)인 명주도(溟州道)에 소속되었다. 조선초기 전국적인 역도 편성 체제의 개편을 통하여 세종대에는 강원도 지역의 역도인 대창도(大昌道)에 속하였으며, 세조대에는 평릉도(平陵道)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평릉도의 속역으로 존속하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명주도에 속한 28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명주에 위치해 있었다. 고려시대 초기의 6과(六科) 체제에서는 5과에 해당하였으며, 12명의 정인(丁人)이 배속되어 있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강원도 강릉 조에 따르면, 당시 대창역에는 역리(驛吏) 30명, 역노(驛奴) 20명, 역비(驛婢) 28명과 대마(大馬) 1필, 기마(騎馬) 2필, 복마(卜馬) 8필 등 총 11필의 역마가 배정되어 있었다. 또 역의 위치는 관문 동쪽 5리 지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조선초에 전국적으로 역도-속역 체계를 갖추는 과정에서 대창도에 소속되었다[『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 그 뒤 1457년(세조 3) 역승 폐지로 기존의 역로가 멀어 찰방(察訪)이 순시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역로가 쇠퇴하는 등의 폐단이 발생하자 1462년(세조 8)에 역로를 개편하였다. 그 결과 대창역은 대창도에서 평릉도로 이속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성종대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되면서 확립된 조선시대 전기의 역도 체제에서도 대창역은 평릉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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