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장씨(禧嬪張氏)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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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희빈장씨 |
한글표제 | 희빈장씨 |
한자표제 | 禧嬪張氏 |
분야 | 왕족/후궁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효종~숙종 |
집필자 | 황선희, 김가람 |
호 | 대빈(大嬪) |
봉작 | 희빈(禧嬪) |
시호 |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
출신 | 왕족 |
성별 | 여자 |
출생 | 1659년(효종 10) |
사망 | 1701년(숙종 27) |
본관 | 인동(仁同)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 |
증조부 | 장수(張壽) |
조부 | 장응인(張應仁) |
부 | 장형(張炯) |
모_외조 | 파평 윤씨(坡平尹氏) |
형제 | (오라버니)장희식(張希栻), 장희재(張希載) (언니)김지중(金志重)의 처 |
처_장인 | 숙종(肅宗) →(자녀)2남 |
자녀 | (1자)경종(景宗) (2자)이성수(李盛壽)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희빈장씨(禧嬪張氏) |
총론
[1659년(효종 10)~1701년(숙종 27) = 43세]. 조선 19대 왕인 숙종(肅宗)의 후궁. 이름은 옥정(玉貞)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중인 출신으로 아버지는 역관(譯官)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할아버지는 의정부(議政府)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된 장응인(張應仁)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의정부 우의정으로 추증된 장수(張壽)이다. 어려서 궁에 들어가 자의대비전(慈懿大妃殿)의 나인이 되었으며, 숙종의 총애를 입어 왕자 이윤(李昀)을 낳았는데, 바로 조선 20대 왕인 경종(景宗)이다. 이후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출되고 왕비가 되었으나,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희빈(禧嬪)으로 강등되었다가 인현왕후의 죽음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자진(自盡)의 명을 받았다.
숙종의 후궁
장희빈(張禧嬪)은 역관이었던 아버지 장형과 그의 후처였던 어머니 파평 윤씨 사이에서 1659년(효종 10)에 태어났다. 장형은 제주 고씨(濟州高氏)와의 사이에서 1남 장희식(張希栻)을 낳았는데, 장희식은 1657년(효종 8) 역과(譯科) 식년시(式年試)의 장원을 하였다.[『옥산부원군신도비(玉山府院君神道碑)』] 한편 제주 고씨가 세상을 떠나자 장형은 파평 윤씨를 새로 들였고 이 사이에서 1남 2녀가 태어났는데, 이 가운데 2녀가 바로 장희빈이다. 이에 대해서는 파평 윤씨가 천민 신분이었으므로 장희빈 또한 천민이었다는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에 파평 윤씨가 천민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숙종실록보궐정오』숙종 13년 6월 16일]
장희빈이 궁에 들어온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11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문이 몰락하여 생계를 이어가기 위하여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다는 설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사촌인 장현(張炫)의 권고에 따라 입궁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그 외에도 아버지 사후 생계를 돌봐주던 장현이 남인과 가깝게 지내다가 <경신환국(庚申換局)>에 휘말리면서 가세가 기울자 남인들의 제의를 받아 입궁하였다는 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4세에서 16세 사이에 궁에 들어오는 것이 궁녀들의 관례였으며, 머리를 땋아 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왔다는 기록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15년 5월 6일]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어렸을 때 이미 궁에 들어왔고, 후에 입궁한 것은 출궁 후에 재입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어려서 궁에 들어온 장희빈은 자의대비(慈懿大妃), 즉 장렬왕후(莊烈王后)의 궁에서 나인 생활을 하다가, 1680년(숙종 6) 숙종의 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난 후, 숙종의 승은을 입었다.[『숙종실록』숙종 12년 12월 10일] 이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장희빈을 출궁시켰고, 이후 숙종의 계비(繼妃)로 궁에 들어 온 인현왕후가 몇 차례 장희빈의 입궁을 부탁하였으나 명성왕후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숙종실록』숙종 12년 12월 10일] 한편 출궁 기간 동안 장희빈은 자의대비의 조카이자 숭선군(崇善君)의 아내인 신씨(申氏)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는 자의대비가 부탁한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1683년(숙종 9) 12월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났고, 3년 상이 끝나자 자의대비는 숙종에게 장희빈을 다시 불러들일 것을 권유하였으며, 이를 기회로 장희빈은 다시 궁으로 들어왔다.[『숙종실록』숙종 12년 12월 10일]
이후 숙종이 장희빈을 지극히 총애하면서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고, 인현왕후는 자신에게서 후사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여러 차례 후궁을 간택할 것을 권유하였다. 결국 간택을 통하여 1686년(숙종 12) 3월 서인(西人)의 영수인 김수항(金壽恒)의 종손녀이자 김창국(金昌國)의 딸인 김영빈(金寧嬪)이 숙의(淑儀)의 품계를 받고 숙종의 후궁이 되었다.[『숙종실록』숙종 12년 2월 27일, 숙종 12년 3월 28일] 이는 서인 측에서 당시 궁녀의 신분이던 장희빈보다 더 나은 지위를 가진 후궁을 통하여 후사를 보게 하기 위함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그리하여 숙의의 신분으로 입궁한 바로 그 해에 김영빈은 회임 등의 별다른 이유가 없음에도 소의(昭儀)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다시 품계가 올라 귀인(貴人)이 되면서 후궁 가운데 가장 높은 품계에 오르게 되었다.[『숙종실록』숙종 12년 5월 27일, 숙종 12년 11월 5일] 그러나 김영빈 또한 회임을 하지 못하였고, 이런 가운데 같은 해 12월 장희빈은 숙원(淑媛)의 품계를 받으면서 정식 후궁이 되었다.[『숙종실록』숙종 12년 12월 10일]
한편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관계는 단순히 왕비의 지위를 둘러싼 대립이 아닌, 숙종 대의 붕당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장희빈이 비록 중인 출신이었으나 그의 당숙인 장현이 남인(南人) 쪽 인물들과 가까웠으며, 인현왕후는 서인 출신이었다. 게다가 경신환국 당시 서인 쪽 인물이었던 명성왕후의 사촌 김석주(金錫冑)가 장현이 복평군(福平君) 형제와 매우 가깝다며 그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결과 장현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장찬(張燦) 및 아들 장천익(張天翼)이 유배를 떠나야 했다.[『숙종실록』숙종 6년 5월 7일] 이러한 이유로 서인 출신의 명성왕후는 장희빈을 남인 측 인물로 파악하고, 그가 승은을 입자 바로 출궁을 시켜 숙종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가문을 바탕으로 실권을 휘두르던 명성왕후 측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지면서 점차적으로 남인 세력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자의대비가 출궁한 장희빈을 도왔다. 그리고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강력하게 장희빈의 재입궁을 건의하였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장희빈은 남인 측 핵심 인물로 부각하였다.[『숙종실록』숙종 12년 12월 10일] 그 결과 장희빈의 재입궁 후 남인과 서인은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각각 내세워 권력 다툼을 하였던 것이다.
경종의 탄생과 왕비 책봉
1688년(숙종 14) 장희빈이 드디어 숙종의 첫째 아들이자 훗날 경종이 되는 이윤을 낳았고, 2달도 채 되지 않아 숙종은 첫째 아들의 명호(名號)를 원자(元子)로 결정하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고하였다.[『숙종실록』숙종 14년 10월 27일, 숙종 15년 1월 11일, 숙종 15년 1월 15일] 아울러 원자의 생모를 희빈(禧嬪)으로 책봉하면서, 장희빈은 당시 귀인으로 후궁 가운데 가장 높은 품계였던 김영빈보다 더 높은 품계에 올랐다.[『숙종실록』숙종 15년 1월 15일]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기 위한 숙종의 의견이 적극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서인 측에서 숙종의 이러한 조치들을 적극 반대하면서 숙종과 서인의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결국 숙종은 서인의 대표 인물인 송시열과 김수항 및 주요 관직에 있던 서인들을 축출하고 대신 경신환국 때 서인들에 의하여 축출되었던 남인들을 등용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그리고 기사환국의 여파는 인현왕후와 김영빈에게까지 미쳐서, 김영빈은 1689년(숙종 15) 4월 작호가 삭탈되고 교지가 소작된 다음 폐출되었으며, 인현왕후는 다음 달인 5월 폐비(廢妃)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15년 4월 22일, 숙종 15년 5월 2일] 이때 숙종은 인현왕후의 투기 및 원자 탄생에 대한 분노, 그 외의 여러 언사를 문제로 삼았는데, 그 가운데 “후사(後嗣)에게 화(禍)를 끼치게 하느니 차라리 과궁(寡躬)의 실덕(失德)을 감수하겠다.”고 하여 인현왕후의 폐출이 국가 차원의 결정이었다고 강조하였다.[『숙종실록』숙종 15년 4월 23일, 숙종 15년 5월 2일, 숙종 15년 5월 4일]
그리고 며칠 뒤인 5월 6일 숙종은 이번에는 장희빈을 왕비로 삼겠다는 생각을 밝혔고, 같은 달 13일 장희빈에게 명호를 내리고 종묘와 사직에 그 사실을 고하였다.[『숙종실록』숙종 15년 5월 6일, 숙종 15년 5월 13일] 다만 장렬왕후의 복상 기간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왕비 책봉례는 이듬해인 1690년(숙종 16) 10월에 이루어졌다.[『숙종실록』숙종 16년 10월 22일] 이로써 장희빈은 중인 출신으로 궁녀를 거쳐 왕비에 오른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장희빈이 왕비의 지위에 오르면서 그의 아버지 장형은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으로, 장형의 첫 번째 부인은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으로 추증되었으며, 장희빈의 생모는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으로 책봉되었다.[『숙종실록』숙종 15년 5월 6일] 한편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1690년 6월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그 해 9월 장희빈의 둘째 아들이자 숙종의 첫 번째 대군(大君)인 이성수(李盛壽)가 태어났으나 열흘도 채 되지 않아 사망하였다.[『숙종실록』숙종 16년 6월 16일, 숙종 16년 9월 16일]
희빈으로의 강등과 죽음
장희빈은 입궁과 출궁, 그리고 재입궁 등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 궁녀에서 왕비로까지 신분이 격상하였으나, 그의 왕비로서의 삶은 5년에 불과하였다. 1694년(숙종 20) 장희빈의 왕후 새수(璽綬)를 거두고, 다시 희빈의 옛 작호를 내렸던 것이다.[『숙종실록』숙종 20년 4월 12일] 장희빈이 폐비가 될 조짐은 이전부터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우선 장희빈 이후 후궁을 들이지 않았던 숙종이 1693년(숙종 19) 4월 회임을 한 최숙빈(崔淑嬪)에게 숙원의 첩지를 내렸다.[『숙종실록』숙종 19년 4월 26일] 그리고 그 해 10월 최숙빈이 낳은 아들이 12월에 세상을 떠났으나, 이때 최숙빈은 다시 회임을 한 상태였다.[『숙종실록』숙종 19년 10월 6일, 숙종 19년 12월 13일] 이어 최숙빈은 다음해 9월 훗날 영조(英祖)가 되는 자신의 둘째 아들을 낳았다.[『숙종실록』숙종 20년 9월 20일] 즉 장희빈에게 집중되어 있던 숙종의 관심이 장희빈이 왕비의 지위에 있는 동안 분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감지한 서인 측에서는 최숙빈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 들였다.
아울러 당시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老論)의 김춘택(金春澤)과 소론(少論)의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민씨 복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남인의 영수이던 민암(閔黯) 등이 이를 기회로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일대 옥사를 일으켰으나, 숙종은 오히려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인들 또한 완전히 축출하였다.[『숙종실록』숙종 20년 7월 8일] 이 사건이 바로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그리고 이어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복위시키는 동시에 한 나라에 두 왕비가 있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장희빈을 희빈으로 강등하였다.[『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숙종실록』숙종 20년 4월 12일] 이와 관련해서는 장희빈에게 세자인 아들이 있으므로 장희빈이 왕비의 지위에 계속해서 있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숙종실록』숙종 20년 4월 12일, 숙종 20년 4월 13일] 그러나 영의정남구만(南九萬) 등의 반대와 숙종의 확고한 의지로 이 주장은 곧 철회되었다.[『숙종실록』숙종 20년 4월 17일]
희빈의 지위로 강등된 장희빈이 또 한 번 격랑에 휩쓸린 것은 1701년(숙종 27) 8월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였다.[『숙종실록』숙종 27년 8월 14일] 인현왕후의 상장례를 놓고 장희빈이 왕비였으므로 다른 후궁들과 복제를 달리해야 한다며 장희빈이 왕비였다는 사실을 다시 언급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숙종실록』숙종 27년 8월 27일] 이는 장희빈이 다시 왕비의 지위에 오르는 것과 연결될 수 있는 문제였으므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 측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해 9월 누군가가 숙종에게 장희빈이 자신의 처소인 취선당(就善堂)의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인현왕후를 저주했으며, 이 때문에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난 것이라고 전하였다. 그러나 장희빈의 측근들은 이 신당에 대하여 1699년(숙종 25) 세자가 천연두에 걸리자 쾌유를 기원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며, 세자가 완쾌되었으나 철거하면 귀신의 분노를 산다는 무당의 말 때문에 철거하지 못하였다고 거듭 주장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기본적인 주장은 이후로도 번복되지 않았지만, 극심한 고문과 함께 심문이 진행되면서 장희빈을 다시 복위시키기 위하여 인현왕후의 죽음을 기원하기도 하였다는 추가 진술이 등장하였다.[『숙종실록』숙종 27년 9월 26일, 숙종 27년 10월 3일]
이런 가운데 노론 측에서는 강력히 장희빈을 탄핵하였고, 숙종의 뜻도 단호하였으므로 결국 장희빈은 자진(自盡)의 명을 받았다.[『숙종실록』숙종 27년 9월 25일, 숙종 27년 10월 8일] 이에 소론의 최석정(崔錫鼎)과 윤지인(尹趾仁) 등이 세자의 생모라는 점을 강조하며 장희빈을 두둔하기도 하였으나, 숙종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숙종실록』숙종 27년 9월 25일, 숙종 27년 9월 27일] 오히려 숙종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도 이 정도이므로, 세자를 위하여 훗날의 근심거리를 제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숙종실록』숙종 27년 10월 8일] 그리고 10월 10일 숙종은 장희빈이 자진하였다는 사실을 공표하였다.[『숙종실록』숙종 27년 10월 10일] 한편 장희빈에게 자진의 명을 내리기 직전 숙종은 빈어(嬪御)에서 후비(后妃)로의 승격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면서, 장희빈은 후궁에서 왕비의 지위에 오른 조선의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숙종실록』숙종 27년 10월 7일]
희빈장씨 사후
비록 장희빈은 숙종의 명으로 자진하였지만, 세자의 생모라는 점을 참작하여 숙종은 그 장례를 품계에 따라 행하도록 하였다.[『숙종실록』숙종 27년 10월 10일] 그리하여 여러 차례 논의 끝에 세자 부부는 3년간 상복을 입는 것이 허락되었고, 무덤 역시 왕실 종친인 이지(李榰)와 예조 참판(參判)이돈(李墩)이 지관(地官)들과 함께 알아보았으며, 장례는 일반 후궁의 3월장이 아닌 4월장으로 치러졌다.[『숙종실록』숙종 27년 10월 11일, 숙종 27년 10월 14일, 숙종 27년 10월 11일, 숙종 28년 1월 30일] 분묘의 경우에도 예장(禮葬)을 하여 종친 1품의 예에 따랐다.[『숙종실록』숙종 28년 6월 11일] 이렇게 하여 장희빈은 양주 인장리, 현재의 경기도 구리시에 안장되었으나,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1718년(숙종 44) 천장(遷葬)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3월 광주 진해촌,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문형리로 이동하였다.[『숙종실록』숙종 44년 2월 20일, 숙종 44년 12월 23일, 숙종 45년 3월 8일, 숙종 45년 3월 12일] 이때에도 장희빈의 무덤은 종친 1품의 예장으로 단장되었다.[『숙종실록』숙종 45년 3월 12일]
1720년(경종 즉위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고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유학(幼學)조중우(趙重遇)가 장희빈을 추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경종실록(景宗實錄)』경종 즉위년 7월 21일] 그러자 노론 측에서 선왕이 떠난 지 한 달 만에 이러한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극렬히 반대하였고, 결국 조중우 및 조중우의 의견에 동의한 이들은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이 과정에서 조중우는 사망하고 말았다.[『경종실록』경종 즉위년 7월 24일] 그러나 이듬해인 1721년(경종 1) 왕위 계승 문제와 관련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가 발생하였다. 그 결과 경종과 뜻을 같이 하던 소론이 최숙빈의 아들인 연잉군(延礽君 : 훗날의 영조)으로 왕위를 교체하고자 한 노론을 축출하고 정권을 차지하였다. 이에 경종은 1722년(경종 2) 장희빈을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하였고, 경행방(慶幸坊), 현재의 서울특별시 낙원동에 장희빈의 신주를 모신 대빈궁(大嬪宮)을 세웠다.[『경종실록』경종 2년 10월 10일] 이후에도 경종은 장희빈을 왕비로 추숭하고자 하였으나, 숙종이 빈어의 왕비 승격을 금지시켰으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재위 4년 만인 1724년(영조 즉위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이 정권을 잡았고, 장희빈의 추존 문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한편 1870년(고종 7) 고종은 장희빈의 신주를 이정빈(李靖嬪)과 이영빈(李暎嬪), 그리고 성의빈(成宜嬪)의 신주와 함께 육상궁(毓祥宮)의 별묘로 옮겼다가, 1887년(고종 24) 원래의 자리로 옮겼다.[『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 7년 1월 2일, 고종 24년 4월 30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7년 1월 20일, 고종 7년 2월 26일] 그러다가 1908년(순종 2년) 개정한 제사 제도의 칙령에 따라 대빈묘(大嬪墓)의 신주는 다시 육상궁으로 옮겨졌으며, 이어 1929년 덕안궁(德安宮)이 육상궁에 추가되면서 이곳은 7개의 신주를 모셨다는 의미로 ‘칠궁(七宮)’이라 불리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순종실록(純宗實錄)』 순종 1년 7월 23일] 서울시 종로구 창의동 12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6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이어 1969년 경기도 광주의 도시구획에 따라 장희빈의 무덤이 도로에 포함되면서, 장희빈의 무덤인 대빈묘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있는 서오릉의 경내로 이장되었다. 아들 경종이 재위하던 당시 만들어진 묘표가 아직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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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 『경종실록(景宗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순종실록(純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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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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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소만록(桐巢漫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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