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차내사(欽差內史)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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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흠차내사 |
한글표제 | 흠차내사 |
한자표제 | 欽差內史 |
동의어 | 흠차내사(欽差內使) |
관련어 | 명사(明使), 천사(天使), 흠차칙사(欽差勅使), 환관(宦官) |
분야 | 정치/외교/사행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태조~선조 |
집필자 | 김경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흠차내사(欽差內史)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2년 5월 23일 |
조선시대 명나라에서 조선에 황제문서를 지참하고 사신으로 파견된 환관.
개설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은 출신과 지참하는 외교문서에 따라 명칭이 구분되었다. 출신은 일반 관원과 환관으로 구분할 수 있고, 외교문서는 황제문서로 제서(制書)·조서(詔書)·고명(誥命)·칙서(勅書)·책(冊)·제문(祭文)·축문(祝文)·유서(諭書) 등과 관부문서로 자문(咨文)·패문(牌文)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환관정치가 성행하였던 명나라는 사신으로 환관을 많이 파견하였는데, 황제문서 내지 황제의 구두지시를 전달한 환관을 흠차내사(欽差內史) 혹은 흠차내사(欽差內使)라 하였다.
명나라는 조선에 대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조선 출신 환관을 파견함으로써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들 흠차내사는 명나라의 정치 구조에서 황제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던 점 때문에 조선은 단순히 일회성 사신으로 인식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사신 접대 및 외교 교섭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흠차내사는 각종 뇌물 압박과 인사 청탁을 요구하여 조선의 외교적 어려움을 만들었지만, 종계변무와 같은 외교 사안에 따라 조선의 대명 외교 통로로 기능하기도 하여 조·명 관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명나라에서 파견된 환관사신을 흠차내사로 지칭하는 것은 주로 조선초기에 집중되었다. 이후 명사(明使)·천사(天使) 등의 용어로 변화되었다.
내용 및 변천
명나라는 건국 이후 국가운영 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규정적으로 환관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였지만, 명 홍무제 스스로 대외 관계에서 해당 국가에 파견하는 사신은 본국 출신 환관을 활용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조선의 경우, 1393년(태조 2) 흠차내사황영기(黃永奇)·최연(崔淵) 등이 황제의 수조(手詔)를 전달한 것이 최초 사례이며(『태조실록』 2년 5월 23일), 영락제 이후 환관의 정치 참여가 보편화되면서 명나라 전 시기에 걸쳐 조선에 환관이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황제가 임명하여 사신으로 파견하면 ‘흠차’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일부 황제문서를 지참하지 않더라도 황제의 선유(宣諭)를 구두로 전달하는 경우에도 흠차내사로 지칭하였다.
명나라의 환관 조직은 12감(監), 4사(司), 8국(局)으로 전체 24아문(衙門)으로 구성되었다. 사례감(司禮監), 내관감(內官監) 등 12감이 중심 아문으로 매 감마다 태감(太監) 1명(正4品), 좌·우소감(左·右少監) 각 1명(從4品), 좌·우감승(左·右監丞)) 각 1명(正5品), 전부(典簿) 1명(正6品), 장수(長隨)·봉어(奉御) 등 종6품의 정원으로 구성되었는데, 홍무제가 규정한 조직 편제였다. 특히, 사례감은 황제의 최측근에서 근무하며, 황성안의 의례(儀禮)와 형명(刑名)을 관장하고, 각종 문서의 관리와 전달을 담당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조선에 파견된 흠차내사는 사례감에 소속된 조선 출신 환관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주요 흠차내사는 태조대 황영기(黃永奇)·최연(崔淵)·노타내(盧他乃)·박덕룡(朴德龍)· 정징(鄭澄)·김인보(金仁甫)·장부개(張夫介), 태종대 한첩목아(韓帖木兒)·윤봉(尹鳳)·이달(李達)·김득남(金得南), 세종대 왕현(王賢)·완적(阮赤)·윤봉 등이 있어 주로 조선초기에 집중되어 있다. 흠차내사로 실록에 기재되어 있지는 않지만, 환관 출신 사신은 황엄·정동 등을 비롯하여 조·명 관계에 과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조선은 중국 사신 접대의례를 『국조오례의』에 규정화하여 시행하였다. 흠차내사의 경우, 지참하는 문서의 종류에 따라 ‘영조서의(迎詔書儀)’, ‘영칙서의(迎勅書儀)’ 등으로 의식이 구분되어 있고, 관부 문서인 자문을 지참한 경우는 별도의 의식을 거행하여 구분하였다. 사신의 접대 등급은 지참하는 문서에 의하여 결정되었기 때문에 흠차내사를 포함한 흠차사신은 중요 사신이었다.
흠차내사가 가지는 정치·외교적 의미는 첫째, 조선의 대명외교에서 제도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명나라는 각종 행정 체계가 매우 복잡하게 설정되어 있어 조선의 외교적 목적을 담은 외교문서가 황제에게까지 전달되는 장기간의 과정이 있었다. 이를 조선이 외교 목적에 맞도록 절차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문서 전달 과정에 있는 인물과 접촉하는 것이다. 이에 조선 출신 흠차내사들은 황제의 측근으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은 흠차내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비록 과도한 요구 조건이 있더라도 이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둘째, 문서 전달의 외교 활동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조명 관계는 사행과 사신 접대라는 형식으로 구성되고, 이는 근본적으로 양국의 외교문서를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공식적이고 의례에 맞도록 작성된 외교문서라 하더라도 적극적인 외교 활동이 필요하였지만, 조선사행의 활동은 북경에서 제약이 많았다. 이에 비하여 조선에 파견된 흠차내사는 조선의 입장에서 명나라의 외교 목적을 전달받는 것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외교 활동을 펼쳐 조선의 외교 목적을 전달할 수 있었던 대상이었다. 셋째, 흠차내사의 정치적 역할이다. 흠차내사는 황제의 측근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조선은 흠차내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양한 외교 교섭의 대상으로 대우하였다.
의의
흠차내사는 주로 조선 출신 환관으로 파견되었으며, 이들은 조선과 명나라의 양국 사정에 모두 익숙하여 조·명 관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황제의 측근이라는 직책을 활용하여 조선에 많은 정치·경제적 압박을 주었지만, 외교 사안에 따라 조선의 대명 외교 통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조·명 관계에서 현대적인 외교관으로서 활동 및 역할을 가졌던 존재로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 『임하필기(林下筆記)』
- 김경록, 「명대 공문제도와 행이체계」, 『명청사연구』 26, 2006.
- 김경록, 「조선시대 대중국 외교문서의 접수·보존체계」, 『한국사연구』 136, 2007.
- 김경록, 「조선시대 사신접대와 영접도감」, 『한국학보』 117, 2004.
- 김경록, 「조선후기 사대문서의 종류와 성격」, 『한국문화』 35, 2005.
- 김송희, 「조선초기 대명외교에 대한 일연구-대명사신과 명사신 영접관의 성격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55·56 합집호, 1998.
- 이현종, 「明使 接待考」, 『향토서울』 12, 1961.
- 조영록, 「鮮初의 朝鮮出身 明使考; 成宗朝의 對明交涉과 明使 鄭同」, 『국사관논총』 14,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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