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룡고조(回龍顧祖)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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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회룡고조 |
한글표제 | 회룡고조 |
한자표제 | 回龍顧祖 |
상위어 | 형국(形局) |
관련어 | 입수(入首) |
분야 | 생활·풍속/풍수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혜정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회룡고조(回龍顧祖)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3년 1월 5일, 『세종실록』 12년 7월 7일, 『숙종실록』 16년 8월 17일 |
용(龍)이 몸을 돌려[回] 조산(祖山)을 돌아보고[顧] 결혈(結穴)된 형국.
개설
풍수에서 땅을 보는 방법에 미시적 방법과 거시적 방법이 있다. 터 전체의 형국을 사물에 비유하는 거시적 방법론이 형국론이다. 태종의 무덤인 헌릉(獻陵)의 형국이 회룡고조형이다. 대개 혈 앞에 있는 안산(案山)은 주산(主山)보다 작거나 비슷하면서 단정하고 수려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지만,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은 높고 큰 조종산(祖宗山)을 안산과 조산으로 한다.
내용 및 특징
풍수 형국론에서 어떤 지세를 용에 비유할 경우, 그 산 모양은 마치 거대한 용이 움직이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본다. 용은 중국과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익숙한 전설상의 짐승으로서 상서로움, 권력, 부귀, 신성, 왕권 등을 상징한다. 역사적으로 용의 형상을 그대로 재현한 가장 이른 유적은 지금부터 6,0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요하 부근의 석소룡(石塑龍)이다. 석소룡은 돌을 용 모양으로 쌓아 둔 것으로서, 현재 용 문화의 기원으로 불리며, 용 문화의 시원이 오히려 한국과 가깝다는 점을 알리고 있다.
용은 새로운 왕이나 권력의 출현을 상징하거나, 농경사회에서는 비를 가져다주는 신령스러운 동물로 인식되었고, 어민들에게는 바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등 다양하게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전설적 동물이다. 대개 용형에는 안산으로서 여의주[珠]나 강 혹은 샘이 있어야 좋은 명당으로 본다. 용 형상은 대체적으로 내룡(來龍)이 굵고 길어야 하며, 그 능선 앞에 여의주를 상징하는 구슬과 같은 작은 산이 안산으로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때 이 여의주를 향해 내려오는 산 능선의 수에 따라 쌍룡, 오룡, 칠룡, 구룡으로서 마을이나 동네의 이름이 붙여지기도 하는데, 그 용의 형상에 따라 다양하게 이름이 붙여질 수 있다. 용형의 유형에 따라 요구되는 안산과 정확한 혈처가 달라진다.
회룡고조란 용이 몸을 돌려 자신을 낳아 준 조산(祖山)을 돌아보는 형국이다. 일반적으로 혈 앞에 있는 안산은 주산보다 작고 단정하며 수려해야 하지만, 회룡고조혈은 이와 약간 다르다. 즉 자신보다 더 큰 조종산이 주로 안산과 조산이 되는데, 같은 혈맥으로 이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압충으로 보지는 않는다. 즉 회룡고조가 아닌 형국에서는 안산과 조산이 지나치게 높으면 혈처가 오히려 눌리는 기세라고 보고 길하지 않다고 판단하지만, 회룡고조형에서는 안산과 조산이 같은 기맥으로 이어 진 조상에 해당하므로 좋은 것으로 본다.
변천
세종시기에 헌릉의 단맥 논쟁이 발생했을 때 헌릉이 길지임을 표현하기 위하여 회룡고조라는 용어가 두 번 언급되고(『세종실록』 3년 1월 5일)(『세종실록』 12년 7월 7일), 1690년(숙종 16) 숙종 시기에 한 번 인용된 이래(『숙종실록』 16년 8월 17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다. 그러나 여주에 있는 세종의 능도 회룡고조형이라고 하여 후세 풍수사들에 의해 자주 인용된다. 일각에서는 회룡고조가 문학적 언어로 전의되어 어버이[祖]의 원한을 잊고 자신을 변절하여[回龍], 타인에게 아부하는 행위를 표현하기도 한다. 풍수지리 내용 가운데 맥을 찾는다는 것은 또 맥락을 찾는다는 문학적 용어로 전의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우실하,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소나무, 2007.
- 정경연, 『정통 풍수지리』, 평단, 2003.
- 최창조, 『한국의 풍수사상』, 민음사, 198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