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룡(來龍)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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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내룡 |
한글표제 | 내룡 |
한자표제 | 來龍 |
상위어 | 용(龍) |
동의어 | 내맥(來脈), 내산(來山), 지맥(地脈) |
관련어 | 간룡법(看龍法), 멱룡법(覓龍法) |
분야 | 생활·풍속/풍수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두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내룡(來龍)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3년 8월 25일, 『세종실록』 23년 8월 27일, 『세종실록』 27년 4월 4일 |
태조산(太祖山)에서 혈처(穴處)로 이어지는 산 능선 전체를 가리키는 말.
개설
내맥(來脈), 지맥(地脈), 내산(來山)이라고도 한다. 풍수에서 내룡을 가장 중요시하는데, 바로 그 내룡을 따라 지기가 흐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룡이란 문자 그대로 조종산에서 혈처에 이르기까지 그 산줄기[龍]가 온다[來]고 보았기 때문에 명명된 이름이다. 따라서 내룡 없이는 혈이 맺힐 수 없고, 혈이 맺히지 않으면 무덤이나 집터로 쓸 수 없다. 또한 내룡을 살피는 일을 가장 먼저 하는 이유는 내룡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 길흉화복이 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룡을 살피는 방법을 간룡법(看龍法), 멱룡법(覓龍法)이라고도 하며, 이 경우에 내룡이라는 표기 대신에 용(龍)이라고 단순히 표기하기도 한다.
내용 및 특징
산을 용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용을 맥(脈)으로 표현하기도 하기 때문에 산과 용과 맥의 차이는 무엇이며, 산맥과 용맥과 지맥의 차이는 무엇인가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러한 용어들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의가 없이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독자가 가장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다.
풍수에서 산은 물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조선조 지관 선발 고시과목인 『감룡경(撼龍經)』에서는 산과 물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개념 정의는 지금까지 풍수의 금과옥조처럼 수용되고 있다. 물보다 한 마디만 높아도 산이 되고, 흙보다 한 마디만 낮아도 물이 감아 도는 것으로 여긴다[高水一寸卽是山 低土水一寸水回環]는 의미이다. 따라서 풍수에서 말하는 산은 상대적으로 평지에서 조금만 높아도 산이 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관념에서 주먹만한 돌이나 조그마한 땅이라도 금옥(金玉)을 이긴다는 풍수학인의 언술이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의미하는 산은 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때 흙[土]은 『장서(葬書)』에서 말하는 기의 몸[氣之體]으로서 의미를 하며, 기를 품지 않는 단순한 물질로서의 흙을 말함이 아니다.
용은 산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한 산이 아니다. 산의 변하는 모습이 천 가지 만 가지 형상인 데다가, 높고 낮고, 크고 작고, 일어나고 엎드리고, 급하고 완만하고, 순하고 거스르는 등 그 형태는 용이 꿈틀거리는 것과 비슷하다 해서 산을 용이라 이름 지었다라고 『인자수지(人子須知)』는 용을 정의한다. 이때 용은 앞에서 언급한 산처럼 높은 산줄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평지의 낮은 언덕도 용이 된다. 그러한 까닭에 『감룡경』은 고산지대에만 용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평지에서는 약간이나마 높게 봉우리를 일으키면 그것이 바로 용이 되고 그 아래 혈을 맺는다고 한 것이다.
맥이 무엇인가에 대해 풍수서마다 풍수학인마다 개념 정의에 차이를 두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풍수와 관련하여 용과 맥을 언급할 때는 특별한 구별이 없다. 즉 발언하는 사람에 따라 동일한 대상에 용이나 맥을 달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조선조 지관 선발 고시과목들도 용과 맥에 대한 의도적인 구별을 하지 않고 있다. 위와 같은 산, 용, 맥에 대한 개념을 전제로 한다면 내산, 내룡, 내맥은 같은 개념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내룡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구분이 가능하다. 넓은 의미에서의 내룡은 조종산으로부터 주산을 거쳐 혈장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산이 포함된다. 용은 조종산이라 불리는 큰 산으로부터 시작된다. 풍수에서 말하는 조산은 모두 중국의 곤륜산(崑崙山)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본다. 크게 셋으로 나뉘는데, 남룡(南龍)은 민산(岷山)으로부터 일어난 장강(長江)과 남해 사이에 끼인 것이고, 중간(中幹)은 서령(西嶺)에서 일어난 황하(黃河)와 장강 사이에 끼인 것이며, 북룡(北龍)은 곤륜으로부터 출발하여 압록(鴨綠)과 황하 사이에 끼인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조종산인 백두산은 바로 이 북룡에서 이어져 온 것이다. 내룡은 태조산→중조산→소조산→주산→입수→혈로 이어진다. 이때의 내룡은 다시 그 뻗어나가는 위치, 용의 크고 작음, 강하고 약함, 생기가 있고 없음, 변화가 있고 없음, 후덕하고 엷음 등을 기준으로 하여 정룡(正龍)과 방룡(傍龍), 진룡(眞龍)과 가룡(假龍), 귀룡(貴龍)과 천룡(賤龍), 빈룡(賓龍)과 주룡(主龍), 노룡(奴龍)과 종룡(從龍), 노룡(老龍)과 눈룡(嫩龍), 장룡(長龍)과 단룡(短龍) 등으로 구분하는데, 이 역시 풍수서마다 그 분류법이 다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내룡이 언급될 때에도 그 발언자나 풍수학인마다 그 사용이 다르기 때문에 문맥상에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할 경우가 많다.
좁은 의미의 내룡은 주산에서 혈처까지 이어지는 용을 살펴서 낙혈 여부나 혈의 대소 혹은 종류를 살핀다. 이 경우에도 두 가지로 나누어 내룡을 살핀다. 첫째, 주산(主山)에서 혈처까지 그리 멀지 않는 경우 이를 입수(入首)로 본다. 즉 좁은 의미에서의 내룡은 입수와 같다. 입수는 풍수서적에 따라 3가지, 5가지 혹은 12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둘째, 주산에서 혈처까지의 거리가 상당히 멀 경우에는 주산→부모산(父母山)→태(胎)→식(息)→잉(孕)→육(育) 등으로 세분하여 말하기도 한다.
풍수에서 산을 볼 때[看山] 가장 주의 깊게 보는 것이 내룡이다. 왜냐하면 내룡은 자손의 번창 여부를 주관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술수적 이유 말고도 유교가 국교인 조선에서는 유교의 종법이 풍수에서 말하는 내룡의 체계와 부합하기 때문에 이를 더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내룡의 중요성은 조선초기에도 주목되어 있다. 세종대에는 내룡의 형세에 따라 능묘 조성 여부가 판가름 나는 논의가 일기도 했다. 1441년(세종 23)에 목효지(睦孝智)는 안산 땅을 빈궁의 장지로 어떠한가에 대해 내룡이 높이 솟고 용호가 둘러싸고 안산이 분명하며 사방의 산이 공손하게 읍하는 곳이 길지인 법인데, 안산 땅은 내룡이 얕고 약하여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민의생(閔義生) 등은 내룡이 얕고 약한 게 아니라 연뿌리나 실처럼 약해 보여도 기맥이 단절된 것은 아니라는 반박으로 옹호하여 결국 안산 땅에 장지가 조성된다(『세종실록』 23년 8월 25일)(『세종실록』 23년 8월 27일). 또 세종의 수릉(壽陵)이 결정되는 과정에서도 내룡이 힘 있고 단정하며, 적당하고 바른 형상은 길지의 요체이지만, 힘이 없거나 단정, 적당하지 않고 기대어 붙거나 비스듬히 비껴간 것은 그 반대라고 하여, 수릉 결정의 중요 요소로 등장한다(『세종실록』 27년 4월 4일).
변천
내룡이란 용어는 세종 때 풍수학인들에 의해 몇 번 사용되었다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다시 순조, 고종 때 몇 번 사용된다. 그보다는 내맥이 조선왕조 내내 골고루 그리고 현격하게 많이 쓰인다. 이는 내룡이란 단어 속에 포함된 용(龍)이란 단어에 대한 금기 혹은 부담감, 거부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내맥보다 내룡이 풍수 용어로서 빈번하게 사용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참고문헌
- 『지리정종(地理正宗)』
- 김두규, 『풍수학사전』, 비봉출판사 2005.
- 서선계·서선술 저, 김동규 역, 『인자수지』, 불교출판사, 1989.
- 최창조, 『한국의 풍수사상』, 민음사, 1984.
- 劉沛林, 『風水, 中國人的環境觀』, 上海 三聯書店, 1995.
- 徐善繼·徐善述, 『地理人子須知』, 臺灣, 竹林書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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