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룡(正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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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맥이 중심을 이루면서 곧고 올바르게 뻗어 온 줄기.

개설

풍수지리에서 결혈처(結穴處)는 곁가지의 산줄기가 아니라 중심으로 이어져 온 정룡의 정기를 받아 내려 온 것을 으뜸으로 친다. 그것은 그 기운이 굳세게 내려왔기 때문에 그것을 활용했을 때 더욱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종법사상을 반영해서 정룡으로 내려온 맥은 가업의 대를 잇는 장남에게 길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한다. 정룡의 맥이 희미하고 치우쳐 있거나 하면 그 기운이 바르지 못하다고 여겨 좋은 자리로 보지 않는다. 정룡이 힘이 없고 기맥이 약하게 내려오면 자연히 방룡의 기세가 우세하게 되기 때문에 풍수지리에서는 정룡을 귀히 여긴다.

내용 및 특징

풍수지리에서 정룡은 곧고 올바르게 뻗은 줄기로서 정룡으로 이루어진 맥을 정룡맥(正龍脈)이라고 한다. 정룡맥은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정기를 받아 나가고 그 곁을 지룡들이 대칭 혹은 비대칭으로 뻗어나가 좌우에서 받쳐 줌으로써 중심에서 줄곧 이어져 결국 결혈하기 때문이다. 정룡은 주변의 산들이 조공하고 둘러 감싸 주게 되어 대개 안정과 조화감을 주는데 정룡으로 제대로 내려 온 맥은 끊임없는 기복과 좌우의 꺾임새로 인해 결혈처 가까이 갈수록 과협이 발달하게 된다. 과협처는 반드시 주위 산들이 사성을 이루면서 보호해 주어 바람이나 물이 치고 들어오는 형국이 없어야 한다. 또 양쪽 곁의 산세는 처음부터 정룡의 본신을 에워싸서 떠나지 않고 혈장까지 이르러야 좋은 것으로 본다.

1445년(세종 27)에 하연(河演),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등은 수릉(壽陵)을 살핀 후 바른 것은 자리가 되고, 옆으로 된 것은 좋지 못하며, 정룡이 내려오지 않고 방룡(傍龍)이 일어나 내려오면 정룡과 방룡 모두 끝나고 끊어지며, 정룡은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방위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림으로써 기맥을 힘 있게 갖춘 정룡으로 내려와야만 길지의 조건을 갖춘 것이므로 헌릉(獻陵)의 자리는 마땅하지 않다는 견해를 보였다(『세종실록』 27년 4월 4일). 이보다 앞서 1432년(세종 14)에 이양달(李陽達)은 원묘를 영건할 터를 논의할 당시, 경복궁 뒤 북악산 아래 자리가 정룡맥이 아니기 때문에 활용해도 된다는 견해를 보였다. 즉 정룡에 대해 정룡으로 이루어진 맥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세종실록』 14년 1월 15일). 또 세조대에는 북악산과 승문원(承文院) 터를 놓고 어느 곳이 길한지를 가리는 관건이 정룡 여부일 정도로 정룡은 주목을 끈다. 이양달과 고중안(高仲安)은 삼각산 봉우리 아래로 보현봉을 끼고 나온 북악산이 정룡의 대맥으로서 인왕산이나 남산과 같은 봉우리를 일으켰다고 하였고, 최양선(崔揚善)은 정룡의 맥은 승문원 자리로 떨어진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북악산이 정룡으로 귀결된다(『세조실록』 10년 9월 7일).

변천

정룡은 『의룡경(疑龍經)』과 『인자수지(人子須知)』에 이미 등장하는 용어인데, 조선시대에는 세종과 단종시기에 정혈을 이루는 중심 맥으로 사용되었다. 정룡은 백두대간 체계에서는 정맥으로 쓰이고 있으며, 현재의 풍수학자들을 중심으로 바르게 내려 온 용맥(龍脈)으로 설명하고 있다.

참고문헌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김두규, 『풍수학사전』, 비봉출판사, 2005.
  • 장성규, 『백두대간의 역사』, ㈜한국학술정보, 2008.
  • 최창조, 『한국의 풍수사상』, 민음사, 1984.
  • 徐善繼·徐善述 撰, 『地理人子須知』, 台北, 武陵出版有限公司, 2000.
  • 楊筠松 撰, 『標點撼龍經疑龍經』, 台北, 六林出版社,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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