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洪葳)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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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홍위 |
한글표제 | 홍위 |
한자표제 | 洪葳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효종~현종 |
집필자 | 이현숙 |
자 | 군실(君實) |
호 | 청계(淸溪), 창람(蒼嵐)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20년(광해군12) |
사망 | 1660년(현종1) |
본관 | 남양(南陽)-당홍(唐洪)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楊州) |
증조부 | 홍익준(洪翼俊) |
조부 | 홍숙(洪琡) |
부 | 홍원호(洪遠湖) |
모_외조 | 배천조씨(白川趙氏): 조정호(趙廷虎)의 딸 |
형제 | (형)홍무(洪茂) |
처_장인 | 덕수이씨(德水李氏): 이침(李梣)의 딸 |
자녀 | (1자)홍천서(洪天敍) (2자)홍귀서(洪龜敍) (1녀)김만길(金萬吉)의 처 (2녀)장정현(張鼎顯)의 처 |
저술문집 | 『청계집(淸溪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홍위(洪葳) |
총론
[1620년(광해군12)∼1660년(현종1) = 41세]. 조선 중기 효종~현종 때의 문신. 자는 군실(君實), 호는 청계(淸溪) · 창람(蒼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당홍(唐洪)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진사 홍원호(洪遠湖)이며, 어머니 배천조씨(白川趙氏)는 대사간 조정호(趙廷虎)의 딸이다. 청백리 홍무(洪茂)의 동생이고, 외삼촌 낙정재(樂靜齋)조석윤(趙錫胤)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35년(인조13)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1649년(효종즉위) 성균관 유생으로서 율곡(栗谷)이이(李珥)와 우계(牛溪)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여러 번 주청하였는데, 이에 반대하는 경상도 유생 9백 여 명으로부터 논박을 당하였다. 1650년(효종1) 31세로 증광시 문과에 갑과 급제하고 문자(文字)와 언사(言事)를 맡아보는 관직에 임명되었다. 1652년(효종3) 세자시강원 설서를 거쳐, 사간원 정언 ·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그때 효종의 구언(求言)에 따라 붕당(朋黨)을 깨뜨리고 조정의 기강(紀綱)을 세우라고 상언(上言)하였다. 이후 민정중(閔鼎重) · 홍처대(洪處大) 등과 함께 영의정정태화(鄭太和)에게 천거되어 암행어사로 나갔다.
1654년(효종5)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 · 수찬 · 교리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655년(효종6) 이조 좌랑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 사서를 겸임하였는데, 남용익(南龍翼) 등 6명과 함께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국조보감(國朝寶鑑)』 권38) 1656년(효종7)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충청도 지방을 염찰하고 돌아와서, 보은현(報恩縣)의 아전들이 군졸들을 멋대로 징발한 사실을 보고하자 효종이 아전들을 효시(梟示)하여 나머지 고을의 아전들을 경계했다. 양주목사(楊州牧使)로 나갔다가, 1657년(효종8)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어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다. 1658년(효종9)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오래 된 폐단을 일소하고 밀려 있던 안건을 처리하느라 건강을 크게 해쳤다. 1659년(현종즉위)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는데, 1660년(현종1) 10월 15일 쇠약한 몸으로 정무를 돌보다가 쓰러져서 돌아가니, 나이가 겨우 41세였다.
저서로는 『청계집(淸溪集)』 8권이 있다.
성품과 일화
홍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정밀하고 민첩하며, 기량이 높고 엄격하였다. 어버이를 공손하게 섬기고 그 뜻을 어기지 않았으며 형 홍무(洪茂)와 한 집에서 화락하게 살면서 떨어져 지내지 않았다. 그는 금천(衿川)에 있던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자라서도 외가의 가풍에 영향을 받았다. 어려서는 외조부 조정호의 품에 안겨 글을 배웠고, 자라서는 외삼촌 조석윤 문하에서 수학하여, 과거에 합격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임금을 섬기면서 대간(臺諫)에서 오랫동안 봉직하였다. 항상 그는 노성(老成)하여, 절실(切實)한 말만 골라서 하였고, 빈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올린 여러 장소(章疏)가 거의 수만 자에 이르렀는데, 여기에는 임금의 일심(一心)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지방 수령관으로 있을 때는 밤낮으로 열심히 일을 처리하여 크고 작은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모든 재상들이 고집해도 허락하지 않던 효종은, 그가 주청(奏請)하면 윤허하였는데, 이는 왕이 그의 충간(忠懇)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원년 10월 17일 홍위의 「졸기」를 보면, “홍위는, 문명(文名)은 약간 있었으나 행정 능력은 없었다. 갑자기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자, 문서 처리에 골몰하여 정력을 모두 소진하였다. 체직되어 서울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라고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선영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84) 죽은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부인 덕수이씨(德水李氏)는 목사(牧使)이침(李梣)의 딸로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홍천서(洪天敍)는 군수를 지냈고, 장녀는 관찰사김만길(金萬吉)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낙정집(樂靜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포저집(浦渚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은봉전서(隱峯全書)』
- 『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
- 『청계집(淸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