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태(洪世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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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53년(효종4)∼1725년(영조1) = 73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 활동한 위항(委巷) 시인. 노비 출신 중인 역관(譯官). 자는 도장(道長), 호는 창랑(滄浪) · 유하(柳下)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무관 홍익하(洪翊夏)이고, 어머니 강릉유씨(江陵劉氏)는 학생 유천운(劉天雲)의 딸이다. 농암(農巖)김창협(金昌協)과 가까운 사이였다.

숙종~영조 시대 활동

1675년(숙종1) 식년시 잡과 역과(譯科)에 한학관(漢學官)으로 합격하여 주로 중국에 파견되는 사행(使行)의 역관으로서 활동하였다. 동시에 시인으로도 이름이 났는데, 1682년(숙종8) 통신사윤지완(尹趾完)을 따라 일본에 갔을 때는, 일본인들이 그의 시묵(詩墨)을 구하려고 그가 가는 곳마다 늘어 서 있었다고 한다. 역관으로 봉직하면 밀무역으로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었으나 그는 역관을 그만두고 문학에만 몰두하여서 생활이 매우 궁핍하였다. 그의 시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에 그는 서리(胥吏) 계층뿐만 아니라 서민(庶民)들과 사대부의 사랑을 받았고, 그는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대가로 일컬어졌다. 역대 여러 임금과 최석정(崔錫鼎) · 이광좌(李光佐)와 김석주(金錫冑) 등도 모두 그의 재능을 아꼈다. 그는 지인들의 추천으로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오래 있지는 못하였다.

1698년(숙종24) 청(淸)나라 칙사(勅使)가 의주(義州)에 이르러 작은 부채를 하나 내놓고 조선의 시인(詩人)이 제목을 정하여 시(詩)를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우리나라 조정에서 시인 선임을 어려워하자 좌의정최석정이 홍세태를 천거하였고, 그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던 숙종은 그에게 4운율시(四韻律詩)를 짓게 하고 이것을 사자관(寫字官)에게 쓰도록 한 다음 칙사에게 주도록 하였다. 홍세태는 그 공으로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선임되었다가, 승문원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중국에 보내는 주문(奏文)과 자문(咨文)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는데, 사람들은 간이(簡易)최립(崔岦) 다음으로 이문(吏文)을 구사하여 외교 문서를 제대로 짓는 사람이 승문원에 있다고들 했다. 이문이란 당시 중국의 외교 문서에만 쓰던 글로 조선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운 글이었다. 1700년(숙종26) 모친상을 당하였고, 1702년(숙종28) 3년상을 마치고 승문원에 복직하였으나 실권자의 비위를 거슬러 임기가 차자, 다시 임용되지 못하였다.

1705년(숙종31) 대제학김창협의 추천으로 둔전장(屯田長)에 임명되었다가, 1710년(숙종36) 통례원 인의(引義)로 옮겼다. 1713년(숙종39) 서부주부(西部主簿)에 임명되고 찬수랑(纂修郞)을 겸임하여 『동문선(東文選)』 속편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그때 숙종이 화공(畵工)에게 ‘서호(西湖)의 십경(十景)’을 그리도록 명하고,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김주신(金柱臣)에게 “십영(十詠)을 지어서 올리도록 하라.” 하자, 김주신은 홍세태에게 부탁해서 글을 지어 바쳤다. 그 공으로 홍세태는 송라도찰방(松羅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15년(숙종41) 제술관에 임명되었다가, 1716년(숙종42) 의영고(義盈庫)주부(主簿)로 옮겼는데, 그는 직언을 하였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만년에 백련봉(白蓮峰) 아래에다 ‘유하정(柳下亭)’이란 집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1719년(숙종45) 우의정이광좌의 추천으로 울산감목관(蔚山監牧官)에 임명되었다가, 1723년(경종3) 남양감목관(南陽監牧官)으로 옮겼다. 이듬해 그는 병으로 말미암아 감목관을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병이 더욱 심해져서 1725년(영조1) 1월 15일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위항문학의 대시인 홍세태

그는 7, 8세에 글을 배웠는데, 입을 열어 말을 하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시문(詩文)을 읊었다. 조금 자라서는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白家)를 읽었는데, 널리 정통하여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문이 없을 정도였다. 시가(詩家)에 더욱 정진(精進)하여, 정신을 기울이는 분야마다 깊이 통찰하고 절묘하게 깨달았다. 시문을 지으면 “천기(天機)가 흘러 나와 음조(音調)와 격식이 조율되어 중국 당(唐)나라 시대 여러 정통 시인들의 경지에 점차 가까워졌다.”고 한다. 김석주는 그를 보고 감탄하기를, “당나라 시인 고적(高適) · 잠삼(岑參)의 풍류(風流)이다.” 하고, 언제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칭찬하였다.

홍세태가 처음 역관에 임명되었을 때, 동료들이 그가 미천한 노비 출신이라고 하여 배척하자, 그는 역관을 버리고 문장 짓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중인 임준원(林俊元) · 최승태(崔承太) · 유찬홍(庾纘弘) · 김충렬(金忠烈) · 김부현(金富賢) · 최대립(崔大立) 등과 함께 시회(詩會)를 열고 교유하면서 위항문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가 위항문학의 대가(大家)가 되자, 농암김창협 등 여러 고관들이 기꺼이 그와 교류하였고, 후세 사람들도 줄곧 그의 시를 즐겨 읊었다.(『청성잡기(靑城雜記)』 권3)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며 8남 2녀의 자녀 중에서 아들 8형제가 모두 그보다 앞서 죽어 불행한 생애를 보냈다. 이러한 궁핍과 불행은 그의 시풍에도 영향을 끼쳐 암울한 분위기의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특히, 중인 신분으로서의 좌절과 사회 부조리에 대한 갈등이 그의 시 속에 우수(憂愁)와 감분(感憤)으로써 절묘하게 녹아 있다. 그는 비절(悲切)하고 그윽한 서정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 특히 뛰어났으므로, 위항문학의 대시인으로서 널리 인정을 받았다. 위항문학이 양반문학과 서민문학의 사이에서 함께 자리 잡는 데에, 그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그는 중인층의 문학을 옹호하는 ‘천기론(天機論)’을 전개하였으며, 위항문인의 시를 모아서 『해동유주(海東遺珠)』라는 위항시선집을 편집 간행하였다.

성품과 일화

홍세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꿋꿋하고 용모가 깨끗하였다. 생긴 모습이 빼어나고 미목(眉目)이 시원스럽게 생겨서, 그를 보는 자들이 특이하게 여겼다.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고 뜻이 크고 높아서 구차스럽게 남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실력을 인정하여 먼저 교제하기를 청한 이들과는 교류하였다. 때때로 세력과 지위를 가지고 압박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화를 내면서, “내가 비록 가난하여 남에게 빌어먹는 신세이지만, 어찌 머리를 숙여서 남의 턱찌끼 취급을 당하겠는가.”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를 모욕하지 못했지만, 이 때문에 당시의 권력자들은 배척하였다.

그는 1719년(숙종45)에 울산감목관을, 1723년(경종3) 남양감목관을 맡았는데, 그가 마정(馬政)을 잘 다스리자, 이졸(吏卒)들이 편하게 여겼다. 공무의 여가에 노구(老軀)를 이끌고 산과 바다 사이를 방랑하여 시를 지으니, 그 시가 더욱 웅장하고 자유 분망해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멀리 유람하면서 질탕(跌宕)하게 시를 읊는 것이 늙은 두보(杜甫)의 아류이다.” 하니, 홍세태도 그 말이 자기를 잘 표현하였다고 좋아하였다. 그는 병으로 말미암아 감목관을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병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실망한 홍세태는 은거하며 사람들과 왕래를 끊었다. 그리고는 상자 안에 간직한 초고(草稿)를 손수 수정하고 편집하여 책으로 만들고, 또 스스로 서문(序文)을 지어서 평생의 자기 뜻을 서술하였다. 그는 아내 이씨(李氏)에게 그 원고를 잘 간직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홍세태가 73세로 돌아간 지 6년 뒤에 둘째사위 조창회(趙昌會)와 문객(門客) 김정우(金鼎禹)가 경비를 모아서 그 유집(遺集) 14권을 간행하였다. 그의 유집 『유하집(柳下集)』에 위항문학의 대표적 작품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서, 위로 임금으로부터 아래로 서민까지 널리 애독하였다. 영조도 어렸을 적에 그의 명성을 듣고 그의 시를 받아다 간직하였노라고,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1758년(영조34)에 홍상한(洪象漢)에게 말한 적이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형말산(荊茉山) 신혈리(神穴里) 언덕에 있으며, 중인 친구 정내교(鄭來僑)가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완암집(浣巖集)』 권4) 부인 이씨는 3년 뒤에 죽어서 그의 무덤 왼쪽에 묻혔다. 홍세태는 자신이 탐욕없이 시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내조(內助) 덕이라 했었다. 자녀는 8남 2녀인데, 아들 8형제를 모두 어려서 여의고 딸만 둘이 있었다. 장녀는 이후로(李後老)의 처, 차녀는 조창회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해동유주(海東遺珠)』
  • 『유하집(柳下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완암집(浣巖集)』
  • 『농암집(農巖集)』
  • 『명곡집(明谷集)』
  • 『동사록(東槎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 『성호사설(星湖僿說)』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일사유사(逸士遺事)』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성잡기(靑城雜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