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전도감(魂殿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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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나 왕비의 승하 후, 혼전을 조성하고 관련 의물을 제작하며 제사 업무를 담당하던 임시 관청.

개설

혼전(魂殿)은 왕이나 왕비가 승하한 후 궁궐에 그들의 혼백을 모시고 3년간 제사를 드리는 공간이다. 혼전도감은 혼전을 조성하고 제사를 거행할 때 필요한 각종 의장(儀裝)과 의물(儀物)을 제작하던 임시 관청이다. 본래 빈전도감은 왕이나 왕비의 시신을 갈무리하기 위해 습렴(襲殮)과 성복(成服), 성빈(成殯)을 배설(排設)하는 일을 담당하였고, 혼전도감은 3년간의 국상 기간 동안 왕이나 왕비의 신주에 제사를 지내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빈전도감과 혼전도감에 대해 조선전기의 상황은 정확하지 않지만, 조선후기는 도감의궤를 통해 보면,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는 빈전도감과 혼전도감이 각기 나누어 설치되었다. 그러나 1800년 정조의 국장 때부터는 빈전도감과 혼전도감이 합쳐져서 설치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혼전에는 선왕(先王)의 영혼을 3년간 궐내에 머물도록 하여 현왕(現王)이 왕권을 안정적으로 승계하고, 왕으로서 확고한 위상을 갖추도록 시간을 예비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때문에 혼전은 궐내의 다른 전각과 마찬가지로 극채색(極彩色) 단청으로 칠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의 존재를 상징하는 당가(唐家) 아래에 신탑(神榻)을 두고 오봉병풍(五峯屛風)을 비롯한 각종 의물을 배치하였다. 이처럼 선왕의 혼전을 현왕이 머무는 궁궐과 마찬가지로 장엄하게 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공유하게 하는 시각 장치의 조형적 표출이었다. 또한 이것은 세속적인 일상성과 차별화시켜 초월적 시간성과 공간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왕실 의례의 속성에도 부합되었다.

조직 및 역할

혼전도감은 왕이나 왕비의 국장 때 빈전도감과 함께 설치되었다. 1800년 이후의 빈전혼전도감은 총호사(摠護使)를 비롯하여 제조(提調), 도청(都廳), 낭청(郎廳), 감조관(監造官) 등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 운영 조직을 『빈전혼전도감의궤』에서 찾아보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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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전혼전도감의 명목상 총책임자인 총호사는 정1품의 좌의정이며, 총호사는 국장과 산릉도감까지 총괄하였다. 빈전혼전도감에는 3명의 제조를 책임자로 두었으며 이들은 정2품의 판서들이었다. 그러나 혼전도감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관리는 도청과 낭청, 감조관이었다. 그리고 실무 행정이나 회계, 창고 업무 등을 맡기기 위하여 서리, 서원(書員), 고직(庫直), 사령(使令), 수직군사(守直軍士)들을 배속하였다. 이들의 정원은 치러야 할 행사의 종류나 그 규모에 따라 차이를 보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인원수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혼전도감은 제작해야 할 의물의 종별에 따라 2방·3방으로 세분되었다. 혼전 2방은 다시 조성소·수리소·별공작을 하부 제작처로 두었다. 조성소에서는 향후 3년간 제사를 모실 혼전의 설치와 왕이 머물 어재실을 조성하였고, 수리소에서는 종친이나 장번내관 등이 머물 처소를 수리하였다. 별공작에서는 도감에 필요한 각종 건물, 내부에 깔 자리[地衣], 비치할 가구 등 각종 잡물을 제작하였다. 혼전 3방은 혼전에 필요한 제기를 주조하였다.

이들 제작처에는 작업을 주관하는 낭청이 늘 있었지만, 의물의 실제 제작 과정에서는 도편수(都邊首)와 편수(邊首)가 장인들을 통제·감독하였다. 도편수는 목수 가운데 우두머리이며, 편수는 제작 공정의 일부를 책임진 우두머리였다. 이들은 대개 장인 가운데 오랜 기간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각색 장인들 중 편수의 위치에 가장 많이 오르는 장색은 노동 집약적인 작업 분야보다는 기술 집약적인 분야의 목수(木手), 석수(石手), 야장(冶匠), 조각장(彫刻匠), 이장(泥匠), 개장(盖匠), 칠장(漆匠), 소목장(小木匠), 주장(注匠) 등이었다.

변천

혼전도감은 빈전도감과 합쳐지며 빈전혼전도감으로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인 1919년 고종황제와 1926년 순종황제 때 빈전혼전주감으로 명칭도 바뀌었다.

한편, 왕세자나 왕세자빈이 승하하면 빈궁혼궁도감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예컨대 조선후기인 1645년 소현세자의 빈궁혼궁도감이 설치되었다. 1728년(영조 4)에는 훗날 진종으로 추숭되는 영조의 첫째 아들 효장세자가 창경궁 진수당에서 세상을 떠난 이후 빈궁혼궁도감을 설치하였다. 1911년 7월 20일 순헌귀비 엄씨가 덕수궁 즉조당에서 세상을 떠난 후에도 빈궁혼궁도감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편전에 혼전을 조성하였으며, 왕이나 왕비의 혼전으로 조성한 전각(殿閣)과 그 전호(殿號)는 다음의 <표 2>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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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왕이나 왕비가 승하한 후 빈전과 혼전을 설치한 궁궐과 전각은 시기마다 조금씩 달라졌다. 17세기에 왕의 빈전은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이었고 왕비의 빈전은 경덕궁의 편전인 융복전에 설치되었다. 반면 왕과 왕비의 혼전은 창경궁의 문정전에 주로 설치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 왕이나 왕비의 빈전은 창덕궁·창경궁·경희궁의 편전에 골고루 설치되었으나, 혼전은 여전히 창경궁의 문정전에 주로 설치되었다. 19세기에는 왕과 왕비의 빈전은 창경궁의 침전인 환경전에 모셨으나, 왕의 혼전은 창덕궁의 선정전에, 왕비의 혼전은 창경궁의 문정전에 설치하는 등 왕과 왕비를 위한 혼전 공간이 달라졌다.

19세기에 들어 혼전도감의 운영과 업무가 변하였는데,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혼전 2방에서 왕과 왕비의 혼전에 비치하고자 제작하였던 의물의 종별이 달라진 것이다. 이에 따라 빈전혼전에 의장·의물을 만들고자 동원한 장인들의 종류와 숫자도 시기에 따라 점차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빈전혼전도감에 참여한 장색은 적을 때는 10여 종에 불과하지만 많을 때는 40종에 이르며 평균 30종이었다. 도감에 동원된 장인의 숫자도 적을 때는 20명 미만이 참여하였고 많을 때는 310명 정도가 참여하였으며, 평균 82명 정도가 참여하였다. 시기별로는 17세기보다 18세기에, 그리고 19세기에 점차 그 인원이 많아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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