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대(扈衛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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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국기인 1897년에서 1905년까지 고종황제의 호위를 담당했던 군대.

개설

고종황제의 호위를 담당했던 호위대(扈衛隊)는 1897년 11월 시종원(侍從院) 호위군을 확대 재편하여 출범하였다. 1905년 폐지되고, 주전원(主殿院) 호위국(扈衛局)으로 개편되어 이어졌다. 호위대의 출범과 폐지에는 독립 국가로서 황제권과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고종의 의지와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일제의 야욕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후 호위대의 후신인 호위국 또한 1907년 군대 해산 때 해체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호위대는 1897년(광무 1) 11월 14일 “시종원(侍從院) 호위군을 호위대로 칭하고, 총관(總管)으로 하여금 편제(編制)하여 들이도록 하라.”는 고종황제의 명령으로 출발했다. 이어 호위대 총관에 시종원 총관이던 이종건(李鍾健)을 임명했으며, 이종건은 명령이 내린 바로 그날 호위대의 조직과 정원에 대한 문서를 올리고 윤허를 받았다. 이로써 당일 호위대가 공식 출범하였다(『고종실록』 34년 11월 14일). 이처럼 호위대는 시종원에 소속되어 있던 호위군을 확대하여 별도의 독립된 군대로 재편한 것이다.

호위대 설립에는 갑오개혁으로 약화되었던 황권을 강화하고, 독립국가로서 군사력을 강화하려 했던 고종의 뜻이 반영되어 있다. 1894년 갑오개혁은 국정 전반에 걸쳐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군사제도 또한 개혁 대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군영들이 신설된 군무아문(軍務衙門)의 지휘 아래 폐지되거나 통폐합되었으며, 군무아문은 전국의 육해군을 근대적으로 개혁하려 했다.

그러나 조선의 군대를 약화시키려는 일제의 의도가 작용하여 군제 개혁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1894년 말 신식 군대인 훈련대(訓練隊)가 창설되었고, 1895년 7월에는 궁궐의 시위를 담당한 시위대(侍衛隊)가 설립되었다. 을미사변 후 훈련대가 폐지되고, 중앙군으로 친위대와 시위대, 지방군으로 진위대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대한제국이 출범하고, 1899년 6월 고종황제는 군 통수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원수부 관제(官制)를 반포하였다. 이때 “대황제 폐하는 대원수(大元帥)로서 군기(軍機)를 총람(總攬)하고 육·해군을 통령하며, 황태자 전하는 원수로서 육해군을 일률적으로 통솔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군사에 관한 모든 권한이 황제에게 집중되었다.

종래 왕을 호위하고 외출 시 가마를 들던 협연군(挾輦軍)·협여군(挾輿軍) 등은 각 군영에서 담당해 왔으나, 갑오개혁 이후에는 공병대(工兵隊) 군사를 이용하였다. 이후 공병대가 해산되자, 시종원에서 정예 군사를 뽑아 호위군을 편성하고 영솔자를 총관(總管)이라 부르게 하였다(『고종실록』 34년 6월 30일). 이때의 호위군이 바로 호위대의 전신이다.

호위대의 편제와 경비는 군부(軍部) 각 부대의 관례에 따르도록 했으며, 훈련 또한 동일하게 하도록 하였다. 호위대의 체제와 훈련·예산 등이 다른 군대와 차이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호위대는 1897년 출범 당시 총관을 비롯하여 632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후 1900년(광무 4)에 730여 명으로 증원되었다. 출범 당시 조직과 규모는 총관(總管) 1명, 정위(正尉) 2명, 부위(副尉) 4명, 향관(餉官) 1명, 정군관(正軍官) 6명, 부군관(副軍官) 6명, 참군관(參軍官) 12명, 상등병(上等兵) 16명, 병졸(兵卒) 584명 등이었다(『고종실록』 34년 11월 14일).

변천

호위대는 설립 이후 업무가 증가하고 복잡해졌다. 이에 1900년 6월 총관서리이재순(李載純)의 건의로 참령(參領) 1명을 증원하고, 해당 직원표를 개정하였다.

호위대의 경비는 해마다 차이가 있지만, 1901년도 호위대 예산은 56,032원으로, 정부 총예산 907만 8682원 가운데 0.6%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때 군부 예산은 359만 4911원으로, 전체 예산의 40%에 달하였는데, 훈련대와 원수부 예산은 별도로 책정하였다. 그만큼 호위대와 원수부가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호위대 예산은 원수부의 73,242원에 못 미치지만, 의정부의 38,298원보다는 많았으며, 법부 예산 56,774원과 비슷한 규모였다. 결코 비중이 작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호위대는 가까이에서 황제를 호위하였으므로 그런 점에서 다른 군대와 다르다는 인식이 있었다. 1904년(광무 8) 초 헌종의 계비인 명헌태후(明憲太后)가 사망했을 때 묘소의 정자각(丁字閣) 포장 등을 담당하여 거행하였으며, 같은 해 황태자비 민씨가 죽자 장례식에서 등롱(燈籠)을 거행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황제를 경호하는 호위대는 임무가 막중하였으므로, 호위대 총관은 황제의 측근 중에서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을 지명하였다. 초대 호위대 총관은 이종건이 맡았고, 이후 민영기(閔泳綺)·민병석(閔丙奭)·민영휘(閔泳徽)·이재순(李載純)·이근택(李根澤)·이봉의(李鳳儀) 등이 임명되었다.

특히 이종건과 민영기·이근택은 여러 차례에 걸쳐 총관을 역임하였다. 이들 총관은 고종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들로 왕실 외척인 여흥민씨(驪興閔氏)와 종실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일제에 협조하였으며, 1910년 합병 직후 남작과 자작 등의 작위를 받아 친일파로 지목되었다.

러일전쟁 후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호위대도 그 영향을 받았다. 1905년 3월 궁내부 관제를 개정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 궁궐 관리를 담당하는 주전원 설립과 그 아래 호위국(扈衛局)을 두는 규정이 있었다. 이에 따라 호위대는 호위국으로 이관되었으며, 이로써 호위대는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호위국 또한 1907년 군대 해산 때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구한국관보(舊韓國官報)』
  • 유영익, 『갑오경장연구』, 일조각, 1990.
  • 장영숙, 『고종의 정치사상과 정치개혁론』, 선인, 2010.
  • 송병기, 「광무연간의 개혁」,『한국사』19, 국사편찬위원회,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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