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청(護産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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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후궁의 출산과 관련된 일을 맡아본 임시 관서.

개설

왕실에서는 의관의 진찰을 통해 후궁의 임신 사실이 확인되면, 출산 예정일 1개월 전에 내의원 안에 임시로 호산청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출산 후 7일째 되는 날 권초제(捲草祭)를 행한 뒤 해체하였다. 호산청은 3명의 제조와 권초관을 따로 임명하지 않는 등 왕비의 출산을 돕는 관서인 산실청(産室廳)과는 직제와 운영 방식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산실을 배설하는 데 쓰이는 물품이나 필요시 산모와 신생아에게 제공할 약 등은 산실청과 동일하게 제공되었다.

호산청의 주요 업무는 후궁의 출산이 안전하게 이루어지도록 최대한 배려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호산청에 소속된 의관과 의녀들은 수시로 문안하여 산모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고, 필요한 약물을 결정하며, 혹시나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대처하였다. 이와 함께 각 기관에서 출산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하도록 감독하였다. 그리고 출산 후에는 태를 씻는 세태(洗胎) 의식이나 권초제 같은 다양한 의례들을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호산청은 후궁이 왕비와 같이 궁궐에서 출산하는 것이 허용된 이후 후궁의 출산을 돕기 위해 조직된 출산 담당 관서이다. 조선시대에 궁궐에서 출산이 허용된 여성은 원칙적으로 왕비와 왕세자빈 등과 같이 왕위 계승자를 낳을 자격이 있는 여성으로 한정되었다. 그래서 16세기 말까지는 왕실의 엄한 법도에 따라 후궁이 임신하면 궁궐 밖에서 출산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16세기 말에 이르러 선조의 후궁인 공빈김씨(恭嬪金氏)와 숙의(淑儀) 정씨가 궁궐 밖 사가(私家)에서 출산하는 과정에서 연이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선조는 1580년(선조 13) 11월 1일, 후궁도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궁궐 안에서 출산하도록 허용하였다[『선조수정실록』 13년 11월 1일].

후궁이 처음으로 궁궐 안에서 출산한 기록은 17세기 초인 1619년(광해군 11)에 광해군의 후궁인 소의(昭儀) 윤씨의 산실을 궁궐 안에 설치하도록 했다는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광해군일기』 11년 4월 8일]. 다만, 이때까지 호산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후궁을 위한 출산 담당 관서가 아직 구체적으로 제도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후궁의 출산을 담당하는 공식 관서로서 호산청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말인 1688년(숙종 14)의 일이다. 이때 희빈장씨(禧嬪張氏)가 뒷날 경종으로 등극하는 왕자를 낳았는데, 호산청 의관에게 자급(資級)을 더하라는 명을 내렸다가 이내 거두었다는 10월 28일 기사에 처음으로 호산청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왕비의 출산을 담당한 산실청보다는 격이 낮은 수준에서 후궁의 출산을 담당한 호산청은 17세기 초에서 17세기 말 사이에 제도적으로 정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육전조례』에 명시된 규정에 따르면, 산실청과 호산청은 그 명칭과 설치하는 시기, 권초관을 임명하는 방식, 의료진을 구성하는 방식 등에서 구별되었다. 호산청은 출산 예정일 3개월 전에 설치하는 산실청과 달리 1개월 전에 설치하였다. 또 호산청의 호산 의관은 내의원에 소속된 내의 가운데 2명을 선정하고, 그중 경험이 풍부한 의관 1명을 수의(首醫)로 임명하여 호산청의 실무 총책임을 맡겼다. 산실의 일을 책임질 호산 의관을 정한 뒤에는 왕의 윤허를 받아 탕약 서원과 의녀를 선정하였다. 의녀는 산실청과 동일하게 2명을 뽑았는데, 산실을 오가며 산모와 신생아의 건강 상태를 의관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출산에 필요한 용품은 크게 산실 배설 용품, 세태와 세욕(洗浴)에 사용할 물품, 권초제에 쓰일 물품, 그 외 잡물로 구분되는데, 호산청에서 해당 관서에 출산 전에 미리 요청하여 준비하도록 했다.

한편 왕실에서는 자녀가 태어나면 7일째 되는 날, 신생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왕실의 출산이 무사히 끝났음을 표시하기 위해 권초제를 행하였는데, 후궁이 출산한 경우 권초관을 따로 차출하지 않고 호산 의관이 이를 담당하였다. 또한 권초제를 행할 때 사용하는 물품 가운데 명정은(命正銀)의 액수에 차이를 두었다. 왕비의 자녀를 위한 권초제에는 100냥을 준비하지만, 후궁의 자녀를 위한 권초제에는 80냥을 준비하였다.

호산청에서는 담당 의관과 의녀들이 문안을 시작할 때부터 출산 일기를 작성했으며, 산모와 신생아의 건강 상태를 즉시 왕에게 보고하였다. 오늘날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에는 후궁의 출산 과정에 관한 기록인 『호산청일기』 2건이 남아 있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와 영친왕의 생모인 귀인(貴人) 엄씨의 출산 기록이다. 이 일기들에는 호산청이 설치된 때부터 해체될 때까지의 일련의 일들이 담겨 있어서 왕실에서의 후궁의 출산 과정을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 『정유년호산청소일기』에 의하면, 엄씨의 경우, 출산 당시 후궁의 직첩을 받기 전인 궁인 신분이었으며, 영친왕을 낳은 이후에 호산청을 설치하였으며, 출산을 통하여 공식적인 후궁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변천

원래 왕비와 후궁의 신분적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 제도화된 산실청과 호산청은 실제로는 출산 당시의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운영되었다. 18세기 말 이후에 왕실에서는 왕비가 왕위 계승자를 낳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런 까닭에 왕위 계승자를 얻기 위해 왕실에서 특별히 간택하여 들인 간택 후궁의 경우, 왕비의 출산과 동일하게 산실청을 설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예를 들면, 정조의 후궁인 화빈윤씨(和嬪尹氏)와 수빈박씨(綏嬪朴氏)가 출산할 때 호산청이 아닌 산실청을 설치하였다(『정조실록』 17년 3월 1일).

그러나 궁인으로서 왕의 승은을 얻어 후궁의 지위에 오른 승은 후궁의 경우에는 호산청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의 산실청과 호산청은 왕비와 후궁의 신분적 차이보다는 후궁들 사이의 신분적 차이를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六典條例』
  • 『産室廳總規』
  • 『護産廳日記』
  • 『護産廳小日記』
  • 김지영, 「조선 왕실의 출산문화 연구: 역사인류학적 접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학위 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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