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저창(豐儲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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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용을 위한 전곡의 수입과 지출을 담당하는 정4품아문.

내용

1. 풍저창의 직제

풍저창(豊儲倉)은 국가의 재용(財用)을 수입·지출하는 일을 관장하는데, 호조 소속의 아문(衙門)이었다. 1392년(태조 1) 7월 새로이 관제를 정비할 때 종5품인 사(使) 1명, 종6품인 부사(副使) 2명, 종7품인 승(丞) 2명, 종8품인 주부(注簿) 2명을 소속 관원으로 두었다. 그 뒤 풍저창의 권무(權務) 녹사(錄事) 2명을 설치하였으며, 1432년(세종 14)에는 형조 우참판을 풍저창 실안제조(實案提調)로 임명하였다(『세종실록』 14년 10월 11일).

1451년(문종 1)에는 담당 관원의 빈번한 교체로 인한 관리 부실 문제를 개선하고자 서강(西江)에 위치한 분풍저창(分豊儲倉)에 구임관(久任官) 1명을 임명하여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460년(세조 6)에는 전곡의 출납을 보다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권지직장(權知直長) 5명을 임명하여 풍저창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매년 6월과 12월에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고찰하여 승진시키거나 좌천시키는 도목(都目)을 적용하였다. 1466년(세조 12)에는 풍저창 사(使)를 수(守)로 고쳐서 정4품아문으로 승격시켰다. 이와 함께 부사(副使)를 주부로, 승(丞)을 직장으로, 부승(副丞)을 봉사로 고쳤으며, 부봉사 1명을 증원하였다. 또한 1469년(예종 1)에 풍저창에 주부 1명을 더 두었다.

한편 1465년(세조 11)에 성균관의 양현고(養賢庫)를 풍저창에 소속시켜 분풍저창(分豊儲倉)으로 바꾸었으나, 성균관의 계속된 반발로 다시 양현고로 환원시켰다.

2. 풍저창의 설치와 변천

풍저창전세(豊儲倉田稅)를 보관하는 본창(本倉)은 군자본감(軍資本監)·광흥창(廣興倉)과 함께 도성 안의 광통교 부근에 있었다. 그런데 1406년(태종 6) 무렵에 오면, 전세를 보관할 창고가 부족하여 바깥에다가 그대로 쌓아 두어야 할 지경에 이르자,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쳐 약 2개월 동안의 공사를 거쳐 1413년(태종 13) 4월에 서강(西江)에 70칸 규모의 분풍저창, 즉 강창(江倉)이 군자강창(軍資江倉)와 함께 건립되었다. 이후 용산에도 강창이 세워졌다. 그러다가 1470년(성종 1)이 되면 강창을 혁파하여 광흥창에 소속시켰다.

참고문헌

  • 오정섭, 「고려말·조선초 각사위전을 통해서 본 중앙재정」, 『한국사론』 27,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2.
  • 이혜옥, 「조선시대의 풍저창」, 『난곡이은순교수정년기념사학론문집』,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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