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유(諷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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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관료가 왕이나 외교 대상 혹은 드러내 놓고 말하기 곤란한 상대에게 이념이나 주장 또는 교훈을 넌지시 전달하는 표현 방식.

개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의 통치 행위에 대한 문신(文臣)들의 비평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전제 왕조 체제에서 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일뿐 아니라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하들은 경전이나 역사서의 특정 구절 혹은 다른 사안에 빗대는 간접적인 표현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를 풍유(諷諭)라고 한다. 왕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은미한 뜻으로 충고하는 미자(微刺), 기미를 보아 사안을 비평하는 기간(幾諫), 풍자의 방식으로 비평하는 풍간(諷諫) 등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풍유는 특별히 우회적인 방식을 중시하는 개념이다.

또한 왕 이외의 인물로 대상을 확대해 사용되기도 하였다.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외교 상대, 의도를 바로 드러내 놓기 어려운 대상, 심지어는 지위가 낮은 아랫사람이라도 은근히 뜻을 전해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을 우회적으로 표현할 때 풍유를 사용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왕에 대한 풍유

조선시대에는 신하들이 경연(經筵)을 통해 시사를 논하고 왕의 행위에 대해 의견을 개진했다. 이때 강독하는 경전이나 역사서의 특정 구절에 근거해 우회적으로 비판과 교훈을 전달하는 풍유의 방법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1479년(성종 10) 3월에 성현(成俔)은 석강(夕講)에 참석하여 『논어(論語)』를 강론하면서 여러 사안을 논하였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이는, 어떤 책을 강론하든 어떠한 처지에 있든 왕에게 풍유한 송나라 때의 유학자 정이(程頤)의 사적을 본받으라는 홍귀달(洪貴達)의 말에 격동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성종실록』 10년 3월 28일). 또 1510년(중종 5) 9월에는 왕이 조강(朝講)에 참석하여 『시경(詩經)』의 「양사(良耜)」 장을 읽었다. 이때 시독관김희수(金希壽)는 주공(周公)이 『시경』 전체를 통해 농사의 중요성을 성왕(成王)에게 풍유한 것이라 해석하고, 농사에 뜻을 두도록 왕에게 간하였다(『중종실록』 5년 9월 27일). 이러한 사례는 신하가 왕을 보좌할 때 항상 경전을 통해 중요한 일을 풍유하였음을 보여 준다.

특히 왕의 측근에 있는 신하들에게 풍유는 일종의 의무처럼 인식되기도 했으므로, 경연 자리에서는 신랄한 비판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내관(內官)이 풍유한 일도 있었다. 1611년(광해군 3) 10월에는 왕이 경연에서 신하들과 덕치(德治) 등의 일을 논하였는데, 사신은 평을 통해 왕의 태만을 비판하면서 내관 이봉정(李鳳禎)의 일화를 소개했다. 왕이 그에게 뚱뚱한 이유를 묻자, 이봉정은 선왕 때는 왕이 늘 공사청(公事廳)에 있고 서무를 결재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자신도 밤낮으로 분주해 밥을 먹지도 편히 자지도 못하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 살이 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광해군일기(중초본)』 3년 10월 14일).

한편 경연을 정지하는 날에는 홍문관 관원이 서책을 참고하여 옛 이야기를 써서 바쳤는데, 이때 부론(附論)이라고 해서 풍유하는 내용을 포함시켰다고 한다. 『현종실록』 기사의 사평에는 이렇게 별도로 올리는 풍유 방식과 제도에 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현종개수실록』 1년 7월 26일).

2. 외교 관계에서의 풍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조선은 일본 및 중국과의 외교에서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중세적 질서에 따른 이른바 사대선린(事大善隣)과는 다른 점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풍유의 표현 방식이 외교적 수사로서 유용하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642년(인조 20)에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을 건립하는데, 조선에서 종을 만들어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최명길(崔鳴吉)은 그 청을 들어주자는 내용의 차자를 왕에게 올렸다. 그는 전쟁을 종식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공덕을 인정하고 자비의 뜻을 담은 교서(敎書)를 보내, 일본의 관백(關白)을 풍유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불경을 잘 아는 문사로 하여금 종의 명(銘)을 짓게 하되, 불경의 말로 그의 공덕을 기술하게 하여 이웃 나라 일본을 감동시키자고 했다(『인조실록』 20년 6월 12일). 최명길은 풍유를 일종의 외교술로 이용하여 국익에 일조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효종대에는 청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 오해를 풀기 위해 풍유를 사용하기도 했다. 인조 말년에 조정에서는 일본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성지(城池)와 기계(器械) 등을 수선했는데, 이는 청나라와의 조약을 어기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정태화(鄭太和)가 사신으로 북경에 가서 인조의 뜻을 전달하고 그들을 풍유하는 일을 하였다(『효종실록』 1년 3월 8일).

변천

1. 우회적 표현으로서의 풍유

중대한 문제이거나 드러내 놓고 말하기 곤란한 내용에 대해 자기주장을 돌려서 표현하려 할 때 풍유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때는 전언 대상이 굳이 왕일 필요는 없으며, 집단이거나 아랫사람인 경우도 있었다.

1620년(광해군 12) 8월 21일에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조식(曹植)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다. 이날 『광해군일기』의 사평에는 그 자초지종이 설명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이이첨(李爾瞻)이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으로서 도통(道統)을 넘보면서 관학 유생들을 풍유하여 이 같은 상소를 올리게 했다고 한다(『광해군일기(중초본)』 12년 8월 21일). 여기서 풍유는 다른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인조가 풍유의 방식을 이용해서 일본의 정치를 설명하며 세자에게 통치의 기술을 가르친 예도 있다(『인조실록』 인조 대왕 행장).

2. 사화(士禍)당쟁(黨爭)에 관련된 풍유

1519년(중종 14)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는 김안로(金安老)가 외직에 있던 이항(李沆)을 대사헌으로 불러들이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항은 대사헌이 되어 곧바로 조광조(趙光祖) 등을 탄핵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중종실록』에는 풍기군수문계창(文繼昌)의 졸기(卒記)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문계창이 이항에게 준 시 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항을 날쌘 매에, 기묘사림(己卯士林)을 여러 굴(窟)로 도망하는 토끼에 빗대어 기묘사림을 일망타진하는 데 이항의 활약을 기대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물론 『중종실록』에서는 『동각잡기(東閣雜記)』나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등에 수록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 채, 일부 시구만을 실어 문계창과 이항의 사적을 폄하하는 효과를 노렸다(『중종실록』 17년 2월 26일).

한편 1675년(숙종 1)에는 유배되어 있던 송시열(宋時烈)의 석방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경연의 책임자였던 김만기(金萬基)는 풍유의 방식을 이용하여 『논어』「안연(顔淵)」 편의 숭덕변혹(崇德辨惑)을 설명하면서, 왕은 사랑함과 미워함에 얽매여 죄가 있고 없음을 분별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숙종실록』 1년 4월 16일).

참고문헌

  • 윤주필, 『윤리의 서사화 -『오륜전비』 수용 연구』, 국학자료원, 2004.
  • 이민홍, 「석주시(石洲詩)의 품격연구 -탁흥규풍(托興規諷)을 중심으로-」, 『한국한문학연구』제9·10합집, 한국한문학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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