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발(擺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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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긴급한 공문서 또는 국경 지역의 시급한 군사 정보를 신속히 전달하기 위해 시행한 군사 통신 제도.

개설

파발(擺撥)을 운영하기 위한 조직은 병조에서 총괄하였으나, 각 지역의 발참(撥站)은 각 도 관찰사·병마절도사 휘하의 각 소재 읍에 예속되어 있었다. 205개의 파발참은 기존 역로(驛路)의 요충지에 설치되어, 서발(西撥)·북발(北撥)·남발(南撥) 등 파발 3대로를 형성하였다. 각 발참에는 발장(撥長)과 발군(撥軍)으로 구성된 파발군이 배치되었다.

파발 제도는 파발 전달이 지체되고 공문서를 훔쳐보거나 분실하는 등의 사고와 재정 부담으로 인한 각종 폐단 등 그 폐해가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변경의 긴급한 군사 정보 및 국내외의 공문서를 신속히 전달하여, 국토 보전과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의 확립, 중국·일본과의 외교 등에 크게 기여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파발의 도입

조선시대에는 주요 통신 제도로 봉수제(烽燧制)를 운영하였다. 전국에 약 533개의 봉수대를 설치하고, 규정에 따라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을 피워 신호를 주고받도록 하였다. 그런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시기 봉수제는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원병으로 파견되어 온 명나라의 관전보부총병(寬奠堡副摠兵)동양정(佟養正)이 발참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그에 따라 압록강에서 평양까지 명나라의 발참이 설치되었고, 파발아(擺撥兒)와 발마가 배치되었다. 1593년(선조 26)에는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도성 탈환을 목적으로 평양에서 한양까지 발참을 설치하였다. 그 뒤에도 명나라 군대가 남진함에 따라 발참의 설치 및 운영 지역은 점차 확대되었다.

파발제가 왜군을 격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에서는 파발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1597년(선조 30) 1월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봉수제를 대체할 새로운 군사 통신 제도의 마련이 시급했던 조선 조정에서는 그해 5월에야 비로소 파발제를 정식 관제(官制)로 규정하였다.

2. 파발 조직

지방 행정 중심지나 군사 거점 등의 교통 요지에 총 205개에 이르는 발참을 설치하고, 발참 사이를 연결하는 파발로를 형성하였다. 전국의 파발로는 한양과 의주를 연결하는 서발, 한양과 함경북도 서수라를 잇는 북발, 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남발 등 3대로로 편성하였는데, 서발은 기발(騎撥), 북발과 남발은 보발(步撥)로 조직하였다. 기발의 경우 25리마다 참(站)을 두었으며, 참마다 발장 1명, 색리(色吏) 1명, 군졸 5명, 말 5필을 배치하였다. 그에 비해 보발은 30리마다 참을 두었고, 참마다 발장 1명과 군졸 2명을 배정하였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군사 통신 수단의 필요에 따라 3대로 외에 전라도·경상도·충청도·강원도 지역에도 발참이 설치되었다.

발참에는 사무를 보는 참사(站舍)와 파발군의 숙소를 비롯해, 창고, 마구(馬廐) 등이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또 문서 전달 업무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일구(日晷) 즉 해시계와 상명등(常明燈), 회력(廻曆), 현령(懸鈴), 피각(皮角), 봉, 무기 등을 비치해 두고 있었다.

파발군은 발장과 발군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임무 수행에 필요한 군량과 말먹이를 늘 준비해 두고 있었다. 『비변사등록』 숙종 30년 2월 2일 조에 의하면, 1704년(숙종 30) 이조 판서 이유(李濡)의 건의에 따라, 해당 지역 출신의 글을 아는 자를 발장으로 임명하여 직첩을 만들어 주고 삭료(朔料)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 권관(權管)의 예에 따라 근무 일수 50삭(朔)이 차면 6품 사과(司果)로 승진하게 하였다. 하지만 파발이 지체되거나 혹은 공문서를 훔쳐보거나 분실하는 등의 사고가 나면 엄한 벌을 받고 파직되었으므로,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발군은 양인 출신의 정병(正兵) 가운데 젊고 민첩하며, 말을 잘 몰고 무예를 갖춘 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괄(李适)의 난, 병자호란 등 거듭된 전란을 거치면서 잡색군(雜色軍)·궤군(潰軍)·노잔군(老殘軍)·방군(防軍)·속오군(束伍軍)·정초군(精抄軍)·장무대(壯武隊)·관군(官軍)·무학군(武學軍)·유청군(有廳軍) 등이 발군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잡색군은 유사시에 동원하기 위해 설치한 예비군이며, 궤군은 병자호란 때 패한 군인이었다. 그리고 방군은 평안도 등에 배치한 방어군이었으며, 속오군은 1594년(선조 27) 전후에 양인과 공사(公私)의 천인으로 구성한 지방군, 정초군은 보병, 장무대는 기병이었다. 그런데 파발군으로 배치된 정초군·장무대·방군 중에는 과중한 군역(軍役)요역(徭役)을 견디지 못하고 유리 도산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3. 파발로와 발참의 정비

조선시대 국가 통신망의 대동맥 역할을 담당한 파발로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대동지지(大東地志)』를 비롯해, 『만기요람(萬機要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청구도(靑邱圖)』 등을 통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대동지지』 발참 조에 따르면, 전국의 파발로는 서발·북발·남발 등 3개 노선으로 편성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다시 본선(本線)에 해당하는 직로(直路)와 지선(支線)에 해당하는 간로(間路)로 나뉘기도 하였다. 서발은 직로인 서북로와 간로인 강계일로(江界一路)·위원일로(渭原一路)·벽동일로(碧潼一路)로, 북발은 직로인 동북로와 간로인 후주일로(厚州一路)·무산일로(茂山一路)로 구성되었다. 그에 비해 남발은 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직로뿐이었다. 『대동지지』를 바탕으로 전국의 파발 조직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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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발참에 부여한 번호를 지도에 표시하여 그 소재를 밝히면 다음 <지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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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송(遞送) 방법은 1주야에 300리를 가도록 하였다. 공문이 발참에 도착하면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곧바로 체송하였다. 발군은 방울을 울리며 달렸으므로, 전방의 발참에서 방울 소리가 들리면 미리 나와 준비하고 있다가 문서를 받았다. 봉투의 격안(格眼)에다 시간과 해당 체송원의 이름을 써넣은 뒤, 문서를 부대와 협판(夾板) 속에 넣고 작은 회력 하나를 매단 후 급히 다음 발참으로 전송하였다. 발참에 도착하면 회력에다 도착 시간을 적게 하여, 유실되거나 지체되는 일이 없게 하였다.

파발제는 조선후기에 시행된 군사 통신 제도로, 변경의 급보나 긴급한 공문서 등을 신속하게 전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발마를 사사로운 용도로 함부로 이용하거나 파발을 통해 사문서를 전달하는 등의 폐단이 생겨났다. 심지어는 기밀이 엄수되어야 할 공문서를 몰래 보거나, 아예 훔친 뒤 빈 주머니만 전달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시책은 순조를 거쳐 고종 때까지 거듭되었으나, 1895년(고종 32)에 농상공부(農商工部) 예하에 우체사(郵遞司)를 두면서 파발제는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남도영, 『韓國馬政史』, 한국마사회 한국마사박물관, 1997.
  • 남상호, 「조선시대 파발제-군사통신제 발달」, 『韓國軍事史 13』, 경인문화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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