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정(佟養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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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초기에 의주에 파견되어 정세를 파악하고 명군 안내 등 조선에 도움을 주었던 명의 장수.

개설

임진왜란 발발 후 일본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한양으로 진격했다. 큰 위기에 휩싸였던 조선 조정은 1592년(선조 25) 4월 29일 평양으로 천도하는 동시에 명에 구원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의 급박한 원군 요청에 동양정은 전쟁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제일 먼저 의주(義州)로 파견되었다.

관전보부총병도지휘(寬奠堡副摠兵都指揮)동양정은 조선의 요청에 따라 자신이 직접 구원군을 인솔하고 조선에 가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지만 상관들의 승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뜻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쟁 기간 동안 조선 측의 어려움을 고려해서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동양정의 헌신적인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활동 사항

조선 조정은 명에 구원병을 요청함과 아울러 함경도에 임해군(臨海君)을, 강원도에 순화군(順和君)을 각각 파견해 병사를 모집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源)을 평안도·황해도순찰사로 임명하여 군사를 모집하도록 지시했다.

다음 날 선조는 평양으로 가기 위해 한양을 출발했다. 왕이 신료들과 함께 한양을 떠나자 도성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왕이 한양을 떠났다는 소식이 퍼져 나가자 경기도 일대의 백성들도 일본군을 피해 도망가기 위해 일대 소란을 야기했다.

조선은 일본군의 침입에 관한 소식과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신을 요동도사(遼東都司)에게 보냈다. 그는 우선 명 조정에 조선의 정황을 보고하는 동시에 동양정을 의주로 파견해 전쟁 상황을 파악하도록 조치했다. 당시 동양정은 의주와 평양 사이에 파발(擺撥)을 배치해 명 조정에 전쟁 상황을 시급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선조실록』 25년 6월 11일).

이후 구련성(九連城)에 주둔하면서 명군과 조선을 지원했다(『선조실록』 25년 7월 30일). 아울러 이여송(李如松) 등이 대군(大軍)을 인솔하고 조선으로 출병할 때, 부대의 이동 시점과 출병 날짜 등을 조선 측에 알려주기도 했다(『선조실록』 25년 12월 17일). 선조는 여러 방면에서 조선에 도움을 주었던 동양정을 위해 예물과 별도의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선조실록』 26년 8월 7일).

하지만 동양정은 조선에 출정한 장수 중 양원(楊元)을 잘못 추천하였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는데, 죄를 받는 대신 군량을 납부하도록 조처되었다. 임진왜란 종전 후 선조는 동양정을 접견했을 때, 조선에 군수 물자를 보내주어 도움을 주었던 사실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당시 동양정은 조선에서 빠른 시일 안에 정병(精兵) 1만을 선발하여 명군의 전투 기술을 배워서 해안 지역을 나누어 지키게 한다면 국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선조실록』 32년 1월 4일).

참고문헌

  • 『기재사초(寄齋史草)』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
  • 『정한위략(征韓偉略)』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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