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상공부(農商工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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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후 농업·상업·공업·통신·해운 등 경제 전반을 맡았던 중앙 행정 관서.

개설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관제를 개정하면서, 갑오개혁으로 설립된 농상아문(農商衙門)과 공무아문(工務衙門)을 합쳐 설치된 기관으로 당시 7부(部)의 하나였다. 여러 차례 업무의 변화와 인원 증감 등을 거쳤으며, 1910년(순종 3)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4년 갑오개혁을 추진한 개화파들은 농민 경제의 안정과 부국강병 국가를 수립하려는 구상하에 농상아문을 설치하였다. 동시에 공업을 발달시키기 위한 공무아문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3월 당시 주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조선 관료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무아문을 둘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관철시켰다. 이에 따라 일본의 압력을 받아 진행된 을미개혁 과정에서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통합한 농상공부가 설립되었다.

조직 및 역할

농상공부의 소속 기관으로는 대신관방을 비롯해 농무국(農務局)·통신국(通信局)·상공국(商工局)·광산국(鑛山局)·회계국(會計局) 등 5국이 있었다. 그중 농무국과 통신국을 중요하게 여겨 2등국으로 하였고, 나머지는 3등국이었다. 관원으로는 대신 1명, 협판(協辦) 1명, 국장 5명, 참서관 4명, 주사(主事) 18명을 정원으로 하고, 기사(技師) 7명, 기수(技手) 13명 이하를 더 두었다. 대신은 칙임관(勅任官) 1등급으로 최초로 김가진(金嘉鎭)이 임명되었다. 협판은 칙임관 3등급으로 최초로 이채연(李采淵)이 임명되었다.

1895년 3월 농상공부 분과 규정(『고종실록』 32년 3월 25일)에 의해 대신관방과 각 국(局)의 과(課) 설치, 사무 분담이 이루어졌다. 대신관방의 비서과는 기밀, 관리(官吏)의 임명과 해직, 대신관인(大臣官印)과 부인(部印)의 관리와 보관, 박람회·포상에 관한 사항을 맡았다. 문서과는 공문서와 성안(成案) 문서의 접수와 발송, 통계·보고의 조사, 공문 서류의 편찬과 보존, 도서와 보고 서류의 간행과 관리를 담당하였다.

농무국의 농사과는 농업과 농업 토목, 농산물의 병충해 예방과 구제, 기타 농산물에 관계된 모든 손해의 예방을 담당하였다. 또한 수의(獸醫)·제철공(蹄鐵工)·축산·수렵을 관장하였다. 삼림과는 삼림업, 삼림 구역의 경계와 조사, 삼림의 보호와 이용·처분, 삼림의 편입과 해제, 삼림 통계와 관련 장부, 임산물과 삼림에 속한 토지·건조물을 담당하였다. 산업과는 어업·어선·어구(漁具), 염전(鹽田)·염정(鹽政), 양잠·삼업(蔘業)·제다(製茶) 등을 맡았다.

통신국의 체신과는 우편·전신(電信)·전화·육상 운송·전기 사업 등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였다. 관선과는 선박·해원(海員)·항로 표시·표류물·난파선·항칙(港則)·수운 회사, 기타 수운 사업 감독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상공국은 상업, 영업하는 모든 회사에 관한 일, 도량형, 공업, 공장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였다.

광산국의 광업과는 광산 조사, 광산의 채굴권 허가 여부, 광구, 광업 보호, 광업 기술을 담당하였다. 지질과는 지질·지층 구조의 조사, 주요 작물, 토성(土性)의 시험, 지형 측량, 지질도·토성도·실측 지형도의 편제와 설명서 편찬, 유용물료(有用物料)의 분석과 시험을 관장하였다.

회계국은 본부 소관 경비와 모든 수입의 예산·결산·회계, 본부 소관의 관유(官有) 재산·물품·장부의 관리를 담당하였다.

변천

농상공부가 정책을 펴 가는 데 중점을 둔 분야는 통신과 농업이었다. 특히 중점을 둔 정책은 통신국이 주관하는 우편과 전신 사업이었다. 통신 분야는 근대화를 이루는 바탕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농상공부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농상공부는 전국적으로 중요 도시에 우체사(郵遞司)를 설치하였고, 1895년(고종32)부터 실시한 우편 사업은 몇 년 동안 계속되어 1897년에는 전국 27개 도시에 우체사가 설치되었다. 그 후 우편 사업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재정 수입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0년 7월에 황제 직속 기구로 통신원이 설치되자 우편·전신 사업은 궁내부 산하로 이관되었다. 그 결과 농상공부의 예산은 1900년까지 급속한 증가 추세를 보이다가 1900년 이후 크게 줄어들었다. 우편·전신 사업이 농상공부 예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상공부에서 농업 가운데 힘을 기울인 분야는 댐의 수축과 황무지의 개간이었다. 또 양잠 진흥에도 노력을 기울여 농상공부농무국에 잠업과를 설치하고 양잠업 진흥에 힘을 쏟았다. 1900년 이후 농상공부 관제를 개정하여, 농무국의 업무인 농업·삼림·수산·목축·수렵 이외에 양잠업을 추가하여 3과 외에 잠업과(蠶業課)가 신설되기도 하였다. 잠업과에서는 누에를 기르거나[養蠶], 양잠 시험장(試驗場) 관리, 뽕나무를 심고[植桑], 누에고치로 실을 만드는[製絲] 일을 담당하였다. 또한 잠업 교육과 전습(傳習)에 관한 사항을 맡아서 집행하도록 하였다. 1900년 12월에는 잠업 시험장이 설치되고 학생들을 모집하여 양잠 기술 전파에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제국기 농상공부는 수산업 진흥과 관련된 뚜렷한 정책을 제시하지는 못하였지만, 해세(海稅) 징수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다. 이 시기 어염 선박에 대한 관리와 보호는 농상공부가 담당하였고, 어세(漁稅)나 염세(鹽稅)는 탁지부 혹은 내장원이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1896년 6월부터 1898년 6월까지는 농상공부가 전국의 해세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농상공부는 사판위원(査辦委員)을 파견하여 어염 선박을 조사한 후 세금을 징수하여, 경우에 따라 탁지부가 보낸 파원(派員)과 수세 문제로 충돌하기도 하였다. 농상공부농무국 산업과는 이들 파원이 조사한 전국 해세 관련 자료를 관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일 해세가 탁지부로 이관될 때 관련 자료 131책을 넘겨주기도 하였다. 물론 그 이후에는 궁내부와 내장원이 어염 선박에 대해 징세하였다.

이 시기 농상공부는 통신 사업, 댐 수축, 양잠 진흥, 광산 경영, 회사 설립 이외의 일은 심혈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농상공부의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고종이 산업 정책을 실시할 때 농상공부보다는 내장원을 통하여 실시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농상공부를 통한 농업 정책은 활발하지 못하였다. 특히 정부 재정 수입과 직결된 사안의 경우 더욱 그러하였다. 삼업의 경우 당초 농상공부가 관장하였으나 1897년 7월 궁내부로 이관되었다.

한편, 그동안 소속 과가 없던 상공국에는 1899년 박람회 참가 준비를 위한 권업과가 설치되었다. 당시 박람회는 국제 사회에 대한제국의 존재를 알리고 문화를 소개하며, 산업·기술의 진흥을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다. 1900년 4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는 한국인이 제조한 전신타보기(電信打報機)와 우표, 각종 토산물을 출품하였다. 외국 박람회 참여를 계기로 국내외 박람회를 담당할 정부 기구로 농상공부 산하에 농상공부 대신이 겸직하는 임시 박람회 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즉, 임시 박람회 사무소는 국내에서 박람회를 개최할 때 사전에 국민에게 고지하여 출품을 권장하는 한편, 사무소에 진열장을 설치하고 내·외국인의 관람을 허용하였다. 임시 박람회 사무소는 1903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제5회 내국권업박람회(內國勸業博覽會)에 175종에 이르는 한국 물품을 보내는 등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임시 박람회 사무소는 1904년 7월 경비 부족을 이유로 철폐되었다.

한편, 농상공부에는 본청(本廳)뿐만 아니라 다수의 외청(外廳)이 신설되었다. 이들 외청은 농상공부 대신의 지휘·감독하에 있거나 농상공부 협판이 책임자였기 때문에 농상공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철도에 관한 업무는 본래 1896년 7월 농상공부 통상국 체신과의 업무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경의철도의 부설, 경부철도 공사 개시 등을 배경으로 철도사(鐵道司)를 신설하고 철도사에서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철도사는 곧 철도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0년 통신원이 독립 개설되면서 농상공부에 있던 통신국은 철폐되었다.

외청의 설치는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 원예모범장, 권업모범장, 농림학교, 공업전습소, 도량형 제조 검정소, 염업 시험장, 임시 면화재배소, 종묘장, 관측소, 임업사무소, 수출우(輸出牛) 검역소, 여자 잠업강습소, 종축목장(種畜牧場) 등이 설립되었다.

통감부의 이런 움직임은 농상공부 조직에도 변화를 주었다. 우선 부서가 산업 영역에 따라 분과의 구성이 세분화되었다. 광무국이 분리되고, 수산국과 산림국이 다시 설치되었다. 농무국의 국유미간지과(國有未墾地課)는, 황실 소유의 토지를 해체하고 이를 국유화한 다음 개간 활용하기 위해 1908년 설치된 부서였다. 그 뒤를 이어 개척과가 만들어졌다. 이처럼 통감부 시대의 농상공부 조직의 확대는 모두 조선 식민지화를 위한 경제 기반 구축 정책의 일환이었다. 농상공부는 조선총독부농상공부로 이어졌다.

대체로 1904년 러일전쟁까지는 황실 중심의 근대화 정책으로 인해 부국강병 정책 추진의 중추 기관이었던 농상공부의 역할은 그만큼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고, 일본인이 관료로 들어오게 되면서 농상공부 조직은 확대일로를 걸었다. 하지만 이는 곧 통감부 주도의 이른바 ‘식민지 개발’의 중추 기관 역할에 불과하였다.

참고문헌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 근대 법령 자료집 1~9』, 국회도서관, 1970~1972.
  • 양상현, 「대한제국기 내장원의 광산 관리와 광산 경영」, 『역사와 현실』27, 1998.
  • 이영학, 「대한제국의 경제 정책」, 『역사와 현실』26, 1997.
  • 이윤상, 「대한제국기 국가와 국왕의 위상 제고 사업」, 『진단학보』9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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