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미단문(太微端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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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정부 종합 청사인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가는 대문의 이름.

개설

단문(端門)은 태미원으로 들어가는 남문(南門)을 일컫는데, 이 대문에 딸린 울타리가 곧 태미좌원(太微左垣)과 태미우원(太微右垣)이다. 단문은 대문이기 때문에 두 개의 문기둥을 가지며, 왼쪽 기둥이 좌집법(左執法)이고 오른쪽 기둥은 우집법(右執法)이다. 좌집법성은 처녀자리 에타별에 해당하고, 우집법성은 처녀자리 베타별이다. 태양이 지나는 길인 황도(黃道)가 이 좌집법과 우집법 사이인 단문으로 지나고 있어, 단문은 태미궁(太微宮)이 해·달·오행성의 칠정(七政)을 집행하는 천상의 최고 권부임을 시사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관측 기사에서 태미원 단문으로 달이 지나거나 화성·금성 등이 드나든다는 표현이 주로 기록된 것도 단문이 황도 상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내용 및 특징

전통 동양 별자리의 구조는 삼원(三垣)과 28수(宿)로 대표된다. 3개의 궁궐인 삼원은 천제가 거처하는 궁궐인 자미궁(紫微宮)과 행정 수반이 집무하는 태미궁, 시민들이 살아가는 도시인 천시원(天市垣)으로 구성된다. 이 셋은 궁성(宮城)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셋 모두 좌우 울타리로 에워싸인 형국으로 표상되었고, 그 좌우 울타리의 출발점이 되는 궁궐 입구에 각기 대문을 갖고 있다. 자미궁의 정문은 창합문(閶闔門)이고, 태미궁의 궁문은 단문이라 이름하였다. 여기에서 비롯하여 천자의 문을 단문이라 일컫게 되었다. 고대 도읍의 궁궐 대문 이름도 이들 별자리에서 따왔는데, 자미궁의 정문인 창합문은 한(漢)·위(魏)시대 낙양궁성의 정문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단문은 1420년(명 영락 18)에 건립되기 시작한 명대 자금성(紫禁城)의 정문이자, 청대 황성(皇城)의 정문 이름으로 쓰였다. 이 단문의 성루에 올라서면 태묘(太廟)사직단(社稷壇), 명(明)·청(淸) 때의 원림(園林) 경관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395년(태조 4)의 『국조보감(國朝寶鑑)』 내용과 『태조실록』 태조 4년 10월 7일 기사를 보면, 한양으로 천도하며 지은 새 궁전의 이름을 정도전(鄭道傳)이 짓고 풀이하였는데, 신궁의 이름은 경복궁(景福宮)으로 하였고, 바르다는 뜻의 단(端)이 곧 바를 정(正)과 같은 뜻이니, 궁의 남문인 오문(午門) 이름을 천자의 문인 단문과 같은 뜻을 지닌 정문(正門)으로 하였다고 설명하고 궁중의 명령과 정교(政敎)가 반드시 이 문을 통해 나갈 것이니 교만과 거짓이 발붙이지 못할 것이며, 백성의 상소와 사방의 현인 역시 이 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이 정(正)의 큰 뜻이라고 말하였다. 이 정문이란 이름은 세종이 “밝은 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두루 미친다[光被四表 化及萬邦]”에서 따온 광화문(光化門)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단문이란 이름은 창덕궁(昌德宮)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의 정문을 일컫는 말로도 쓰였다. 1744년(영조 20) 10월 창덕궁과 인접한 승정원(承政院)이 불타면서 인정문(仁政門)도 함께 연소되었다. 인정문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인정문을 지을 재목이 부족하니 사가(私家)의 나무를 사서 복구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왕은 사가의 나무를 베어 쓰는 것은 구차한 일이라고 하였다. 지금 단문을 짓기 위해 사가의 나무를 벤다면 이후로도 토목 공사가 있을 때마다 사가에서 베어 올 수 있으니 그 폐단이 크다고 하였다(『영조실록』 20년 11월 27일).

이 인정문 곧 단문에서 즉위한 왕으로는 연산군과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이 있다. 『승정원일기』의 1724년(영조 즉위) 9월 25일 기사를 보면, 우의정유봉휘(柳鳳輝)가 사임을 청하는 상소문에서, 지난번 국상을 당한 초기에 마침 서성(西省)의 직소(直所)에 나아가 입직하였으나, 단문에서 영조가 즉위하는 날에는 자신이 병든 상태여서 제대로 격식에 맞게 배종(陪從)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일성록』의 1782년(정조 6) 1월 17일 기사에서 채제공(蔡濟恭)의 도배(島配)를 청하는 상소문을 보면, 채제공의 죄는 이미 다 말하였으며 지난번 단문에서 조회(朝會)를 할 때 우의정이 영의정을 이어서 한목소리로 연석에서 아뢰었다 하였다. 또한 『일성록』의 1783년(정조 7) 1월 9일 기사에는 영중추부사김상철(金尙喆)이 새해에 단문에서 조회할 때에도 모두 함께 나아가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왕이 새해 첫 달 상순에 단문에서 조회를 보는 것은 뭇 신하를 맞이하여 자문한다는 뜻을 가진다(『헌종실록』 7년 1월 12일). 이것은 조선후기 내내 창덕궁을 정궁으로 사용할 때 정전인 인정전과 그 남문인 단문 곧 인정문 사이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매년 새해 조회를 거행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하늘 태미원의 기운이 창덕궁의 인정전 단문으로 내려온 것이라는 천인상응(天人相應) 우주론을 엿보게 한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 『한서(漢書)』 「천문지(天文志)」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천문류초(天文類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일권, 『(동양 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고구려 하늘에 새긴 천공의 유토피아』, 사계절, 2008.
  • 김일권,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대부터 조선까지 한국 별자리와 천문 문화사』, 고즈윈,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