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문(午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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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자금성의 남쪽 정문.

개설

북경 자금성의 남쪽에 있는 정문으로 정면에 3개의 문이 있고 양측에 곁문이 있다. 성루는 5개의 누각이 있어 오봉루(五鳳樓)라고도 한다. 북쪽의 정루를 중심으로 양측에는 남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복도가 있어 북·동·서쪽이 에워싸인 광장이 형성된다. 정루의 양측과 복도의 남쪽 끝 양측 네 곳에는 제사 등을 알리는 종과 북을 보관 유지하는 누각이 있다. 오문은 조현(朝見)을 기다리며 대기하는 장소였으며 황제의 즉위 등 중요 행사에서 방대한 의장 행렬이 도열하기도 하였다.

위치 및 용도

천안문의 북쪽에 위치한다. 정면에 3개의 문이 있고 좌우 양측에 작은 문인 액문(掖門)이 있다. 문무관원은 좌측 문으로 종실의 왕공들은 우측 문으로 다녔고, 중문은 황제의 전용 문이었다. 조선의 사신들은 주로 액문을 이용하였다. 청대에는 매월 초 5일·15일·25일에 있었던 조참례(朝參禮)에 왕공 이하 관원들이 오문 앞 어로의 양측에 도열하여 조회를 기다렸다. 청대에는 조참례에 사절들도 참여하여 황제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명·청대에는 황제의 즉위, 결혼, 황후의 책립, 제사, 순행, 정벌 등이나 매년 춘절·동지 만춘의 3대 절일에는 모두 성대한 의례를 거행하였다. 이때 오문 밖에서는 백관들의 방대한 의장 행렬이 있는데 이것을 노부(鹵簿)라고 하였다. 군대의 개선에는 황제가 직접 오문의 성루에 올라 포로를 받는 의식을 가졌다. 청대의 황제는 매년 한 차례씩 수렵을 나섰는데 황제가 출발할 때 왕공대신들이 오문 밖에서 황제의 안녕과 조기 귀환을 빌었다. 청대에는 매년 달력을 반포하는 의식을 오문에서 갖기도 하였다. 조선 사신들은 외교문서인 자문(咨文)을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조참례·신년하례·지영(祗迎) 등 각종 형식의 의례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중 지영은 황제가 특별한 목적으로 출궁 혹은 회궁할 때 사신들도 참가해서 환영을 하는 의례로, 대개 지영을 위하여 대기하던 곳이 오문이었다(『정조실록』 23년 10월 12일).

변천 및 현황

명대인 1420년(영락 18)에 건설되었으며, 청대인 1647년(순치 4)에 중건되었다. 현재 고궁박물원 남문이다.

형태

정면에 3개의 문이 있고 양쪽에 각각 1개의 곁문이 있다. 성문의 높이는 8m에 달한다. 북쪽의 정루는 겹처마의 무정전 양식으로 정면은 9칸, 높이는 총 38m에 달한다. 정루의 양측에는 남쪽으로 길게 뻗은 팔작지붕 양식의 복도가 있어 북쪽과 동서쪽이 에워싸인 광장이 형성된다. 또한 정루의 양 끝과 양 복도의 남쪽 끝에는 종과 북이 보관 유지되는 종고정(鍾鼓亭)이 있다. 종고정은 정방형의 4개의 기왓골이 중심부에 모이는 삿갓지붕에다 겹처마 방식이다.

참고문헌

  • 『연도기행(燕途紀行)』
  •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 『연행록(燕行錄)』(이익성)
  • 史爲樂 主編, 『中國歷史地名大辭典』,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5.
  • 何本方, 嶽慶平, 朱誠如 主編, 『中國宮廷文化大辭典』, 雲南人民出版社, 2006.
  • 孟凡人, 「明北京皇城和紫禁城的形制布局」, 『明史研究』 8, 中國明史學會, 2003.
  • 韓東洙, 「18世紀朝鮮《燕行錄》與北京紫禁城-以儀禮空間之分析爲中心」, 『中國紫禁城學會論文集(第七輯)』, 紫禁城出版社,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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