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채(沈菜)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채소를 소금이나 간장에 절여서 국물이 넉넉한 음식.

개설

채소절임 음식은 소금물·간장·된장·고추장·식초·젓갈 등과 같이 삼투압 작용이 가능한 매개물에 채소를 절인 음식을 가리킨다. 침채는 소금물이나 간장에 절여서 국물이 넉넉한 채소절임음식을 가리킨다. 고대에 침채와 비슷한 말로 쓰인 글자는 저(菹)와 지(漬)이다. 저는 본래 신맛이 나는 채소절임 음식을 가리켰고, 지는 소금물이나 간장이나 식초에 절여서 국물이 넉넉한 채소절임 음식을 가리켰다. 저와 지의 대용어로 침채란 말이 고려후기부터 문헌에 나타난다.

만드는 법

『산가요록(山家要錄)』에 있는 침백채(沈白菜) 조리법은 다음과 같다. “깨끗이 씻은 배추 1동이에 소금 3홉을 고루 뿌려 넣고 하룻밤 지낸다. 다시 씻어서 먼저처럼 소금을 뿌리면서 항아리에 담고 물을 붓는다.” 조선 중기의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는 생치딤채법[生雉沈菜法]이란 조리법이 나온다. “오이지의 껍질을 벗겨 속은 도려내고 가늘게 1치 길이만큼 도독도독 썰어 물에 우려 둔다. 꿩은 삶아 오이지와 같이 썰어 따뜻한 물에 소금을 알맞게 넣어 나박딤채같이 담가 삭혀서 먹는다.” 오이지에 꿩고기를 넣고 볶은 음식을 꿩침채라고 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자주 등장하는 침채는 산갓침채[山芥沈菜]이다.

『음식디미방』에는 산갓침채의 조리법이 나온다. “산갓을 다듬어 찬물에 씻고 다시 더운물에 헹구어 단지에 넣고 물을 데워서 붓는다. 구들이 뜨겁게 되면 단지에 옷을 싸서 익히고 뜨겁지 않으면 솥에 중탕을 하여 익힌다. 너무 뜨겁게 하여 산갓이 물러져도 안 되고 익혀지지 않아도 안 된다. 찬물에만 씻고 더운물에 헹구지 않으면 맛이 없다.” 소금이나 간장을 사용하지 않고 더운물에 데쳐서 채소를 절인 침채가 바로 산갓침채이다. 산갓 자체에 매운 성분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조리를 해도 산갓을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다.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침채 만드는 여러 방법이 나온다. 다만 이 책에서는 침채 대신에 저(菹)라는 한자를 사용하였다. 그중에 황과담저법(黃瓜淡菹法)의 조리법은 다음과 같다. “늙지 않은 오이를 가져다가 꼭지를 떼고 깨끗하게 씻는다. 칼로 3쪽에 칼집을 내어 고춧가루를 조금 넣고 또 마늘 4~5조각을 넣는다. 오래 끓인 물에 소금을 넣고 아주 뜨거울 때 오이에 붓는다. 이때 오이를 먼저 항아리에 넣는다. 항아리 주둥이를 단단하게 싸맨다. 그다음 날에 먹을 수 있다.” 이 조리법에서 비로소 고춧가루가 들어간 ‘저’가 등장한다.

연원 및 용도

고려 때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순무[菁]를 주재료로 하여 여름에는 간장에 절여서 먹고, 나머지 계절에는 소금에 절여서 먹으면 좋다는 시가 나온다. 이색(李穡)의 『목은시고(牧隱詩藁)』에는 개성 사람 유구(柳玽)가 우엉과 파와 무를 섞어 담근 침채장(沈菜醬)을 보내왔다는 시가 있다. ‘곡주(谷州)에서 산개염채(山芥鹽菜)를 얻었기에 이에 감사하며[得谷州山芥鹽菜致謝]’라는 시도 이 책에 나온다. 즉 산갓을 소금물에 절인 김치인 산개염채에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매운맛을 보태서 더욱 맛이 좋다고 했다.

조선에서는 영조대에 산갓침채에 대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 허균(許筠)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함경도의 산갓침채가 자신이 맛본 침채 중에서 최고로 맛있었다고 적었다. 고종대에는 입춘 때 삭녕(朔寧) 등의 여러 고을에서 산갓침채를 진상하였는데, 백성들의 폐해가 된다고 하여 그만두게 하였다(『고종실록』 9년 10월 15일).

빙허각이씨의 『규합총서(閨閤叢書)』에도 산갓침채가 나온다. “입춘 때 무를 가늘게 깎고 여기에 미나리·순무·파 등을 넣어 맹물을 끓여 나박침채를 담가 더운 데 둔다. 이 침채가 익을 만하면 산갓을 깨끗이 씻어 더운물에 끓인 후 이것을 나박침채에 넣는다.”고 했다. 나박침채는 무를 주재료로 한 침채로 가장 널리 먹었던 채소절임 음식이다.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침채는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 무침채[蘿葍沈菜], 산갓침채 혹은 갓침채[芥沈菜], 송이침채(松茸沈菜), 토련침채(土蓮沈菜), 생치침채(生雉沈菜) 등이다.

침채와 같은 뜻으로 쓰인 ‘저’는 제향에 올리는 제물이었다. 두(豆)에 올린 물에 젖은 제물 중에 근저(芹菹)·순저(筍菹)·청저(菁菹)·구저(韭菹) 등이 나온다. 이 저를 두고 『의례통해(儀禮通解)』의 속주(續注)에서는 제(齏)는 저와 비슷한 계통이지만, 채소와 육류 전부를 얇게 썬 것이 ‘저’이고, 가늘게 썬 것이 ‘제’라고 했다. 그러니 저를 침채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이 제물을 북한에서는 나물, 남한에서는 김치로 번역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침채를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대량으로 마련하는 일을 침장(沈藏)이라고 불렀다. 정학유(丁學游)는 1819년(순조 19)경에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음력 10월편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적어 두었다. “시월은 맹동(孟冬)이라, 입동(立冬)·소설(小雪) 절기로다. 나뭇잎 떨어지고, 고니 소리 높이 난다. 듣거라 아이들아, 농삿일[農功]을 필하여도, 남은 일 생각하야, 집안일 남김없이 모두 하세. 무·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앞 냇물에 정히 씻어, 짠맛과 싱거운 맛[鹹淡]을 맞게 하고, 고추·마늘·생강·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독 곁에 중두리요, 바탕이 항아리라. 양지에 김치광[假家]을 짓고, 짚에 싸 깊이 묻고, 호박 잘 익은 밤도, 얼지 않게 간수하소.”

홍석모(洪錫謨)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음력 10월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두었다. “서울 풍속에 만청(蔓菁)·송(菘)·산(蒜)·초(椒)·염(鹽)으로 옹기에 저(菹)를 담근다. 여름의 장(醬)과 겨울의 저(菹)는 곧 민간에서 1년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여기에서 ‘만청’은 무이다. 다른 말로 나복(蘿葍: luobo)이라고 불렀지만, 홍석모는 ‘만청’이라고 적었다. ‘송’은 배추를 가리킨다. ‘산’은 마늘이다. ‘초’는 천초와 고추이다. 왕실의 침장은 사옹원(司饔院)에서 주관하여 만들었지만, 민간에서 맛있는 침채를 구해서 왕의 수라상에 올리기도 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규합총서(閨閤叢書)』「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도문대작(屠門大嚼)』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목은시고(牧隱詩藁)』
  • 『산가요록(山家要錄)』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수운잡방(需雲雜方)』
  •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 『훈몽자회(訓蒙字會)』
  • 주영하, 『음식인문학: 음식으로 본 한국의 역사와 문화』, 휴머니스트,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