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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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 달래 등을 가리키는 한자 말.

개설

조선초기의 학자 최세진(崔世珍)이 집필하고 후에 여러 차례 수정된 어학사전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산(蒜)을 대산(大蒜), 소산(小蒜), 야산(野蒜), 독산(獨蒜) 등으로 구분하였다. 대산은 마늘, 소산은 달래, 야산은 죡지, 독산은 도야마늘이라고 했다. 허준(許浚)은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대산은 마늘, 소산은 족지, 야산은 달랑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소산은 조선초기까지 달래로 번역되다가 중기 이후부터 족지로 번역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죡지 혹은 족지의 뜻은 정확히 알기 어렵다.

원산지 및 유통

마늘은 본래 이집트·로마·그리스의 지중해 연안에서 재배되었는데, 동쪽으로 퍼져서 중앙아시아로 전해졌다. 한나라 무제(武帝) 때 장건(張騫)이 실크로드를 개척해 서역과 교역을 시작하면서 마늘이 중국에 전래되었다. 본래 중국에서 ‘산(蒜)’은 달래류를 가리키는 한자였다. 중국의 산과 달리 서역에서 온 대산은 매우 컸다. 처음에는 오랑캐 지역에서 왔다고 하여 ‘호산(胡蒜)’이라고 불렀다. 호산이 점차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가자 본래 있던 산을 ‘소산(小蒜)’이라고 부르고, 서역에서 전해져 온 산을 ‘대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반도에는 고려시대 이래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연원 및 용도

세종·세조대의 왕실 어의였던 전순의(全循義)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산가요록(山家要錄)』에는 ‘침산(沈蒜)’이라는 조리법이 나온다. “덜 여문 산을 캐서 겉껍질을 벗기고 깨끗이 씻는다. 산은 물기 없이 제대로 말리고, 끓는 물에 소금을 넣되 짜지 않도록 한다. 이 물이 식기를 기다려 산을 담가 둔다. 먹을 때는 껍질을 벗기는데 색이 하얗고 맛이 좋다.” 껍질을 벗기는 것으로 보아 『산가요록』의 ‘침산’에 나오는 산은 마늘인 것으로 여겨진다.

태종대에 의정부(議政府)에서 대마도주소사다시게[宗貞茂]에게 옷감을 비롯하여 소주·곶감·밤 등과 함께 산을 10두(斗) 보내주었다(『태종실록』4년 1월 9일). ‘두(斗)’라는 도량형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여기에서의 산은 마늘로 여겨진다. 아마도 당시에 대마도에는 산이 생산되지 않아서 보내준 것으로 보인다.

산은 왕실에서 잔치 음식을 장만할 때에도 상당히 널리 사용되었다. 가령 꿩통구이[生雉全體燒] 한 그릇에 들어가는 재료는 생꿩[生雉] 50마리, 참기름[眞油] 2승(升), 후춧가루[胡椒末], 5전(錢), 잣가루[實柏子末] 1합(合), 깻가루[實荏子末] 1합(合), 생파[生葱] 3뿌리[本], 산 10뿌리, 소금[鹽] 1승, 간장(艮醬) 1승이다. 이와 같이 고기가 들어가는 음식에는 산이 향신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생활민속 관련사항

세종 때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는 절차에서 의식을 참례할 집사관에게 3일 전부터 삼가할 일이 예조(禮曹)에 의해 정해졌다. 일은 평소와 같이 하지만, 술을 과음하지 말고, 파·부추·마늘·달래 등을 먹지 말라고 했다(『세종실록』 1년 8월 8일). 이러한 관습은 불교에서 수행자에게 먹지 못하도록 금지한 오신채(五辛菜)에서 나온 것이다. 오신채는 마늘·파·부추·염교[薤]·흥거(興渠: 무릇)를 가리킨다. 남북조시대 유송(劉宋)에서 유행했던 불교 경전인 『범망경(梵網經)』에서 “오신(五辛)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경전이 널리 퍼져 고려시대 이래 오신채를 삼가는 일이 불교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산은 조선시대 여러 음식에서 빠지지 않고 사용했던 향신료이다. 침채류를 비롯하여 육고기와 생선을 재료로 한 음식에는 산이 빠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몸에서 마늘 냄새가 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 『동의보감(東醫寶鑑)』
  • 『범망경(梵網經)』
  • 『산가요록(山家要錄)』
  • 『훈몽자회(訓蒙字會)』
  • 金鍾德, 「葷菜類에 대한 文獻的 考察-大蒜, 小蒜, 韭, 薤, 葱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 주영하, 「한국향신료의 역사」, 『향신료의 지구사』, 휴머니스트,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