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崔琇)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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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최수 |
한글표제 | 최수 |
한자표제 | 崔琇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백실(伯實) |
호 | 고주(孤舟)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89년(선조 22) |
사망 | 1654년(효종 5) 7월 22일 |
본관 | 강릉(江陵) |
주거지 | 여주(驪州)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여주(驪州) 여강(驪江) |
증조부 | 최공우(崔公佑) |
조부 | 최중륜(崔重崙) |
부 | 최진영(崔震榮) |
모_외조 |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이정(朴而禎)의 딸, 박경(李賡)의 후손 |
처_장인 | 광산김씨(光山金氏): 김덕일(金德一)의 딸 →(자녀)2남 3녀 |
자녀 | (1자)최하봉(崔夏封) (2자)최노봉(崔魯封) (1녀)민방(閔枋)의 처 (2녀)이흠(李欽)의 처 (3녀)송지필(宋之弼)의 처 (서자)최한봉(崔漢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최수(崔琇) |
총론
[1589년(선조 22)∼1654년(효종 5) = 66세]. 조선조 중기 인조·효종 때 활동한 문신. 행직은 형조 좌랑(佐郞)이다. 본관은 강릉(江陵), 주거지는 경기도 여주(驪州)이다. 자는 백실(伯實), 호는 고주(孤舟)이다. 아버지는 직장(直長)최진영(崔震榮)이고,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부사용(副司勇)박이정(朴而禎)의 딸인데, 부마(駙馬) 박경(李賡)의 후손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15년(광해군 7) 27세에 생원시(生員試) 2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시대 정권을 잡은 북인(北人)들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고 서인(西人)을 탄압하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10년 동안 과거 시험에 아예 응시하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과거를 실시하자, 수많은 응시생이 몰려들었는데, 그는 정시(庭試) 제 4방(榜)에 참여하여, 그 방에 첫 번째로 합격하였다.(『설봉유고(雪峯遺稿)』 권27「통훈대부 행형조좌랑 최공수 묘갈명(通訓大夫行刑曹佐郞崔公琇墓碣銘)」 참고. 이하 「묘갈명」 약칭.) 그러나 대과에 합격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으로 지냈다. 1625년(인조 3) 5월 인조가 성균관에 행차하여 유생들에게 정시를 보였다. 이에 최수가 합격하자, 인조가 동부승지(同副承旨)이목(李楘)에게 전교하기를, “생원 최수는 회시(會試)에 바로 응시하게 하라.”고 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참고.) 최수는 회시에 직부(直赴)하였으나, 전시(殿試)에서 낙방하였다.
과거를 포기하고,1637년(인조 15) 추천을 받아 목릉 참봉(穆陵參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나이 50세가 넘어서 다시 과거 시험을 준비하여, 1639년(인조 17)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 3위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51세였다.(『방목』) 성균관 학유(學諭)에 임명되어 학정(學正)·박사(博士)를 거쳐, 1645년(인조 23)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묘갈명」 참고.) 이듬해 1646년(인조 24) 형조 좌랑에 임명되어, 형정(刑政)을 바로잡기에 힘썼다. 그러나 너무 늦게 과거에 합격하였기 때문에 관리로서 역량을 발휘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효종 시대 활동
효종 초년에 최수는 영춘현감(永春縣監)으로 나가서, 청렴하게 백성을 다스려서, 고과(考課)에서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 (「묘갈명」 참고.) 그때 효종은 <북벌(北伐) 계획>을 세우고, 중앙의 군정(軍政)을 개혁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전국의 군현에도 군적(軍籍)을 정리하고 성벽(城壁)을 보완하게 하였다. 1653년(효종 4) 3월 효종은 홍처대(洪處大)와 민정중(閔鼎重)을 충청도 지방의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파견하여 주군(州郡)의 수령들 가운데 군정을 충실하게 하지 않는 자를 적발하게 하였다. 암행어사는 군정을 포기한 영춘현감최수, 충원현감(忠原縣監)유석(柳碩) 등 여섯 고을 수령을 서계(書啓)로 보고하니, 효종이 대노하여 그들을 모두 파직하였다. 최수는 고향 여주로 돌아와서 시름에 잠겨 있다가, 마침내 노병이 났다. 1년 이상 병으로 고생하다가 1654년(효종 5) 7월 22일 여강(驪江)의 촌사(村舍)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6세였다.
성품과 일화
최수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순수하고 행실이 고결하였다. 그는 털끝만큼도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생각한 적이 없었고, 글을 보면서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가끔씩 벼슬을 하였으나 공무가 아니면 밖에 나가지 않았다. 사람을 상대할 적에 비록 벼슬이 높더라도 마음에 맞지 않은 점이 있으면 전혀 구차스럽게 아부하지 않았고, 비록 빈천한 사람이라도 마음에 취할 바가 있으면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대하였다.(「묘갈명」 참고.)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여주 여강에 있는데, 그보다 21년 전에 죽은 부인 김씨(金氏)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강백년(姜栢年)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설봉유고(雪峯遺稿)』 권27「통훈대부 행형조좌랑 최공수 묘갈명(通訓大夫行刑曹佐郞崔公琇墓碣銘)」)
부인 광산김씨(光山金氏)는 현감(縣監)김덕일(金德一)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최하봉(崔夏封)은 진사(進士)이고, 장녀는 생원 민방(閔枋)의 처가 되고, 3녀는 진사 송지필(宋之弼)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편)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설봉유고(雪峯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