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융청(總戎廳)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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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총융청 |
한글표제 | 총융청 |
한자표제 | 總戎廳 |
관련어 | 기보총융사(畿輔摠戎使), 오영군문(五營軍門), 중앙군영(中央軍營)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고종 |
집필자 | 윤훈표 |
폐지 시기 | 고종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총융청(總戎廳) |
조선후기에 서울과 그 외곽인 경기도 일대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설치했던 중앙군영(中央軍營).
개설
경기도 일대의 속오군(束伍軍)을 중심으로 총융군(摠戎軍)을 편성하여 국왕의 호위를 강화했다. 그 당시 반정공신이면서 경기감사로 재직하였던 이서(李曙)를 1624년(인조 2)에 기보총융사(畿輔摠戎使)에 임명함으로써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초창기에는 경기도 내의 정군(正軍), 속오군, 별대마군(別隊馬軍) 등으로 구성되었다.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허약해진 궁궐 숙위를 보충하기 위해 총융군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1674년(숙종 즉위)에는 총융사의 수하친병인 아병(牙兵) 10초와 둔아병(屯牙兵) 3초를 첨가해서 내영제(內營制)가 성립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내외 2부(部) 3영(營)체제가 갖추어졌다. 1747년(영조 23)에 그동안 북한산성을 관할하던 경리청(經理廳)을 폐지하고 북한관성장(北漢管城將) 이하를 본청에 소속시켰다. 1750년 재정 부담이 크다며 총융사를 경기병사가 겸하고 본청을 북한산성에 출진(出陣)하게 했으나 1760년(영조 36)에 도로 환원시켰다. 정조 때 화성(華城)을 중심으로 장용외영(壯勇外營)이 설치되자 수원진(水原鎭)의 군무를 이속시켰다. 1846년(헌종 12) 총위영(總衛營)으로 개칭하였다가 1849년에 다시 원상으로 복구하였다. 1882년(고종 19)에 친군영제(親軍營制)가 도입되면서 잠시 폐지하였다가 곧 다시 설치하였으나 1884년에 완전히 혁파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하자 곧바로 후금에 대한 강경책을 펼쳤던 인조 정권은 서울과 그 외곽인 경기도 일대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일어났던 이괄의 난으로 임금이 공주로 피신하는 사태에 직면하자 조속하게 서둘러 마련하였다. 그 하나로 경기도 일대의 속오군을 중심으로 총융군을 편성하여 국왕을 호위하였다. 그 당시 경기감사였던 이서를 1624년에 기보총융사에 임명함으로써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초창기에는 경기도 내의 정군, 속오군, 별대마군 등으로 구성되었다. 초기 편제는 경기도를 수원, 광주, 양주, 장단, 남양의 5영으로 나누고 기본적으로 매 영마다 3부, 부마다 2사, 사마다 5초를 두는 제도를 골격으로 삼았다. 그러나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 또한 마군의 필요성을 감안하여 매 사의 중초(中哨)는 마군으로 편성하였다.
운영은 경기도 각 읍의 삼수미(三手米)를 본읍에 그대로 유치하고 둔전을 널리 개간하여 그 수확으로 재정을 충당하되 군사들에게는 급보(給保)하는 식이었다. 그 편성을 보면 초창기에는 대체로 수도의 외곽에 대한 방위를 담당하도록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허약해진 궁궐 숙위를 보충하기 위해 총융군을 동원하였다. 장초군 10초와 둔장초 3초를 뽑아 겨울 3개월 동안 도성에 들어와서 궁궐을 숙위하게 했다. 이로써 서울과 그 외곽인 경기도 일대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1674년 총융사의 수하친병인 아병 10초와 둔아병 3초를 첨가해서 내영제를 성립시킨 것을 계기로 내외 2부·3영체제가 갖추어졌다. 먼저 내영의 편제는 2부, 6사, 26초에 종2품 사(使) 1명, 종2품 중군(中軍) 1명, 정3품 천총(千摠) 2명, 종4품 파총(把摠) 6명, 종9품 초관(哨官) 26명을 두어서 지휘부를 구성하게 했다. 그 아래 교련관(敎鍊官) 15명, 기패관(旗牌官) 2명을 두어서 훈련을 담당하게 했다. 그 밖에 군관 10명, 본청 군관 3명, 별부료군관(別付料軍官) 2명, 감관(監官) 2명, 수문부장(守門部將) 1명, 한량군관(閑良軍官) 150명 등의 장교급 인원들이 배치되었다.
외영(外營)은 초창기 5영이었으나 숙종 때 경기좌도와 우도를 수어청(守禦廳)과 분할 책임지게 했는데, 아마도 이것을 계기로 3영체제로 바뀐 것 같다. 그 책임자는 정3품 진영장(鎭營將)으로 3명인데 남양부사, 파주목사, 장단부사가 겸임하도록 했다. 그 밖에 기본 편제에 들어가지 않는 2개의 외영이 더 있었다.
변천
1747년에 그동안 북한산성을 관할하던 경리청을 폐지하고 북한관성장 이하를 본청에 소속시켰다. 1750년 재정 부담이 크다며 총융사를 경기병사가 겸하고 본청을 북한산성에 출진하게 했으나 1760년에 도로 환원시켰다. 1764년 일시적으로 5영체제로 환원했으나 1792년에 다시 3영체제로 환원되었다. 정조 때 화성을 중심으로 장용외영이 설치되자 수원진의 군무를 이속시켰다. 1846년 총위영으로 개칭하였다가 1849년에 다시 원상으로 복구하였다.
한편 임오군란으로 시국이 매우 어수선해지자 고종은 왕실의 경비를 강화할 목적으로 1882년에 친군영제를 도입하면서 이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복구되었으나 1884년에 완전히 혁파하였다.
의의
조선후기에 경기도 일대의 병력을 조직해서 수도 외곽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점차 궁궐의 숙위 및 북한산성의 관리까지 담당하였다. 이로 인해 숙위 및 수도 외곽의 방어가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만기요람(萬機要覽)』
- 陸軍士官學校 韓國軍事硏究室, 『韓國軍制史 - 近世朝鮮後期篇』, 陸軍本部, 1977.
- 李泰鎭, 『朝鮮後期의 政治와 軍營制 變遷』, 韓國硏究院, 1985.
- 車文燮, 『朝鮮時代軍事關係硏究』, 檀國大學校出版部, 1996.
- 최효식, 『조선후기 군제사연구』, 신서원, 1995.
- 吳宗祿, 「중앙군영의 변동과 정치적 기능」, 『조선정치사 1800~1863㈛』, 청년사, 199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