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석희(擲石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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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市井)의 무리들이 두 패로 나뉘어 상대방에게 돌을 던지며 승부를 겨루던 집단놀이.

개설

척석희(擲石戱)는 우리말로 돌팔매놀이다. 석전(石戰), 또는 편을 갈라 싸운다는 의미의 편전[邊戰]·편전(便戰)과 같은 말로서 석전놀이, 돌팔매놀이라고도 한다. 석척희(石擲戱), 또는 석전희(石戰戲)라는 용어도 있는데, 모두 척석희와 같은 뜻이다. 척석희는 놀이의 의미가 매우 크지만 실은 그 위험성에 대한 지적이 더 많았다. 개천이나 넓은 가로(街路) 등의 지형을 경계 삼아 수백 보 거리를 두고 일대의 주민들이 마을 단위로 편을 갈라 서로 돌을 던져 누가 먼저 쫓겨 달아나느냐의 여부에 따라 승부를 가리는 전통 사회 집단놀이의 하나다.

연원 및 변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저자 홍석모(洪錫謨)는 『당서(唐書)』「고려전(高麗傳)」에 “매년 정초에 군중들이 패수(浿水) 가로 모여 노는데 물과 돌을 서로 끼얹고 던지며 밀고 밀리기를 두세 번 하다가 그친다.”고 한 기사를 인용하여 석전, 또는 척석희가 여기에서 시작된 것 같다고 하였다.

『수서(隨書)』「고구려전(高句麗傳)」의 다음 기사도 이와 유사하다. “해마다 연초에 패수 가로 모여 놀이를 하는데, 왕은 요여(腰輿)를 타고 나아가 우의(羽儀)를 나열해 놓고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이 의복을 물에 던지는데 군중들은 좌우 두 편으로 나뉘어 물과 돌을 뿌리거나 던지고 소리치며 쫓고 쫓기기를 두세 차례 하다가 그친다.”

『고려사(高麗史)』 「금령(禁令)」조에는 1345년(고려 충목왕 1) 단오 때 척석희를 금지시켰다고 하였다. 또 1374년(고려 공민왕 23)에 격구와 석전놀이[石戰戱]를 금하였다고 하고, 얼마 안 있어 1380년(고려 우왕 6)에는 왕이 석전놀이를 관람하기를 원했다고 하였다. 즉 고려후기에 척석희에 대한 금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행해져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시기는 모두 5월 단오 때여서 보리 추수 이후에 행해졌던 풍속임을 알 수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국초부터 척석희는 행해졌다. 1393년(태조 2)에 왕이 청심정(淸心亭)에서 척석희를 구경하였다는 기사가 있고(『태조실록』 2년 5월 2일), 그 이듬해인 1394년(태조 3)에는 왕의 명으로 성중(城中)에서 척석희를 하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척석군(擲石軍)이라 이름 지었다고 하였다(『태조실록』 3년 4월 1일).

고려와 마찬가지로 조선에 들어와서도 중기에 이르도록 척석희는 단오행사의 하나였다. 이색(李穡)의 『목은선생문집(牧隱先生文集)』을 보면 당시는 대부분 지역에서 단오 때 한 것으로 나온다. 1401년(태종 1)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국속(國俗)에 5월 5일에 넓은 가로에 크게 모여서 돌을 던져 서로 싸워서 승부를 겨루는 습속이 있는데, 이것을 ‘석전’이라고 한다.”고 하였다(『태종실록』 1년 5월 5일).

1410년(태종 10)에는 척석희를 금하고, 이 놀이를 한 29명을 잡아 가두었다고 하였다(『태종실록』 10년 5월 5일). 1421년(세종 3)에는 “상왕(태종)이 병조 참판 이명덕(李明德)을 보내어 석전할 사람 수백 명을 모집하여 좌우대(左右隊)로 나누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세종실록』 3년 5월 3일). 세종 때는 의금부에서 단오 석전놀이를 금하였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 등 종친들이 이 놀이를 관전하였을 뿐 아니라 독전(督戰)하였다고 하여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1469년(예종 1)에는 성중의 사람들이 훈련관의 사장(射場)에 모여 척석희를 하였는데, 양진(兩陣)이 서로 싸우다가 사상자까지 나오고 사녀(士女)들이 다투어 구경하였다고 하였다(『예종실록』 1년 5월 5일). 세종도 사람이 다칠까 염려하여 이를 금한 바 있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다시 하게 된 것이다. 성종 때도 역시 석전놀이를 금지시켰다는 기사가 나오는데(『성종실록』 4년 5월 6일), 이는 곧 이 놀이가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행해져 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1555년(명종 10)에 왜변(倭變)이 일어났는데, 명종이 왜구를 진압할 방책을 의논하던 중 석전꾼[石戰軍]으로 김해 사람 100명을 뽑아 보낸 것처럼 안동 사람들을 뽑아 방어하게 하자는 대책이 나왔다(『명종실록』 10년 5월 27일).

조선후기로 내려오면 척석희라는 용어는 잘 쓰지 않았다. 대신 석전, 또는 편전[邊戰]이라고 하였다. 조선후기 이후 석전놀이는 단오 행사에서 정월 대보름 행사로 옮겨 갔다. 즉 후기에는 석전꾼을 배출한 김해 지방 말고는 대개 정월 보름밤이나 다음 날인 16일에 많이 했다. 이는 곧 단오의 쇠퇴와 관련된 것이며, 나아가 후기에 이르러 밭농사 지역보다 논농사 지역이 확대된 결과이다.

1771년(영조 47)에 왕이 평양에서 상원일(上元日), 즉 정월 대보름에 벌이는 석전을 엄중히 금지하게 하고, 서울에서 단오에 벌이는 씨름과 원일(元日)에 벌이는 석전도 포청에 분부해서 못하게 할 것을 하교하였다(『영조실록』 47년 11월 18일).

절차 및 내용

일 년 가운데 석전이 행해지던 시기는 대개 정월 보름밤이고 다음 날인 16일인 지역도 있다. 김해 지역에서는 오월 단오에 행하는데, 『목은선생문집』이나 『고려사』 신우조(辛禑條),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는 명종 때까지 척석희가 단오 행사의 하나로 나왔다가 조선후기 이후 단오 행사가 쇠퇴하면서 차차 정월 보름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 풍속에는 횃불싸움[炬戰]이 있고, 춘천 지역 풍속에는 외바퀴 수레를 만든 다음 이것을 동리별로 편을 나누어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 서로 싸우는 수레싸움[車戰]이 있다. 무엇을 매개로 겨루는가의 차이 말고는 척석희나 줄다리기와 함께 승패의 결과로써 그해의 농사일을 점치는 집단놀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경도잡지(京都雜誌)』를 보면, 서울 외곽에서 벌어진 석전, 즉 척석희를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삼문(三門) 밖의 주민들과 아현 주민들이 만리동 고개에서 돌을 던지며 서로 싸웠는데, 속설에 삼문 밖 편이 이기면 경기 일대에 풍년이 들고 아현 편이 이기면 팔도에 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삼문이란 숭례문, 돈의문(서대문) 및 그 중간의 소의문(서소문)을 말한다. 용산과 마포에 사는 불량소년들 중에는 패를 지어 와서 아현 편을 돕는다. 바야흐로 싸움이 한창 심해지면 고함소리가 땅을 흔들 정도가 되며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져도 후회하지 않는다. 관에서 가끔 이를 금하는 조치를 취한다. 성안의 아이들도 이를 본받아 하므로 행인들이 모두 돌에 맞을까 무서워 피해 돌아간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다음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해 지방 풍속에 매년 4월 초파일부터 아이들이 성 남쪽에 모여 들어 돌팔매싸움[石戰] 연습을 한다. 그러다가 단옷날이 되면 장정들까지 모두 모여 좌우로 편을 갈라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고 날뛰면서 마치 비가 오듯 돌을 던지다가 승부가 난 뒤에야 끝난다. 이때 비록 죽거나 다친 자가 나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며, 고을 수령도 이를 막지 못한다. 중국 대만성(台灣省) 동항(東港) 일대의 한족들도 석전놀이를 하였는데, 시기는 매년 5월 5일이었다. 청나라 광서(光緖) 연간에 가장 흥했고, 지금은 쇠미해졌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목은선생문집(牧隱先生文集)』
  • 『수서(隋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고점상, 『중국민족 절일대전(節日大全)』, 지지출판사, 1993.
  • 손진태, 「석전고」,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1948.
  • 정승모, 「세시관련 기록들을 통해 본 조선시기 세시풍속의 변화」, 『역사민속학』1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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