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복전(隆福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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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의 침전.

개설

경희궁에는 융복전과 회상전(會祥殿)이라는 두 개의 침전이 있었다. 융복전은 17세기 광해군대에 창건하여 조선후기 동안 서궐인 경희궁의 침전으로 존재하였다. 비록 현존하지는 않지만, 조선시대의 기록들을 통하여 경희궁에서의 위치와 형태 등을 알 수 있다.

위치 및 용도

순조대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서궐도안(西闕圖案)」을 보면,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崇政殿) 동쪽에 두 개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배치되었다. 융복전은 회상전 동쪽에 있다. 융복전 앞쪽에는 일영문(日永門), 뒤쪽에는 개경문(開景門)과 회화문(會化門)이 있다.

궁궐은 정치 영역인 외전(外殿)과 생활 영역인 내전(內殿)으로 구분된다. 경희궁의 내전 영역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융복전과 회상전 주변으로는 덕유당(德遊堂), 집경당(集慶堂), 흥정당(興政堂), 영선당(永善堂), 사현합(思賢閤), 정시합(正始閤) 등이 배치되어 있다.

정조가 지은 「경희궁지(慶熙宮志)」에는 융복전이 경희궁의 정침(正寢)이고 회상전은 국왕이 거처하는 내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궁궐지(宮闕志)』에는 회상전이 궁궐의 정전(正殿)이고 융복전은 회상전의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이후 융복전은 빈전(殯殿)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융복전은 광해군대 경희궁을 창건할 당시에 지어졌다. 『광해군일기』에 경희궁 침전의 설치와 완공이 언급되어 있으나, 건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융복전에 대한 보다 상세한 기록은 순조대 이후에 볼 수 있다. 1829년(순조 29), 경희궁에 화재가 발생하여 내전 전각들이 소실되었다(『순조실록』 29년 10월 3일). 이듬해인 1830년에는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1831년(순조 31)에 공사를 마쳤다. 이때의 중건 내용은 1832년(순조 32) 발간한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에서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이보다 앞선 시기의 「서궐도안」에서도 융복전이 확인되지만 융복전에 대한 실제 모습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시기는 순조대이다. 융복전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기록물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형태

궁궐에서 왕과 왕비의 침방(寢房)이 있는 건물을 침전이라고 한다. 왕과 왕비의 침전은 지붕 용마루에 회반죽을 발라 마감하지 않고 구부러진 기와로 지붕을 이었는데, 융복전의 지붕도 동일하게 했다. 융복전 왼편으로는 회장각(會藏閣)이라는 건물이 연결되어 있고 이들 건물 앞쪽에 월대를 널찍하게 두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74년(현종 15)에 효종 비이며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빈소를 융복전에 설치하였다. 1720년(숙종 46)에는 숙종이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숙종은 경희궁의 회상전에서 태어나 융복전에서 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서궐도안(西闕圖案)」
  •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경희궁 영조 훼철관련 사료조사 및 활용방안 연구』, 서울특별시, 2004.
  •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편, 『궁궐지Ⅱ: 창경궁·경희궁·도성지』,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6.
  • 서울특별시, 『경희궁 태녕전지 건립부지 발굴조사 보고서』, 서울특별시, 1996.
  • 서울특별시, 『경희궁지 발굴조사보고서』, 서울특별시, 1998.
  •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 -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건축』, 동녘, 2010.
  • 최종규, 「경희궁 복원을 위한 전각배치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 홍석주, 「조선조 광해군대의 궁궐건축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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