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역(維安驛)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황해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청단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황해도 송화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고려시대 성종에서 문종 연간에 전국의 525개 역을 22개 역도(驛道)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유안역(維安驛)은 산예도(狻猊道)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조대에 역제(驛制)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청단도(靑丹道)를 구성하는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황해도 송화현(松禾縣)에 위치하였으며,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역(驛)은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하고, 중앙과 지방의 행정 명령 계통을 확립하기 위한 육상 교통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왕명(王命) 및 긴급한 군사 기밀의 전달, 사신의 왕래에 따른 영송지대(迎送支待) 등을 주로 담당하였으며, 그밖에 진상품 또는 공부(貢賦)의 운송 및 왕래인(往來人)의 규찰 등을 맡아보았다. 유안역도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고려시대부터 황해도 지역에 설치되었다.

조직 및 역할

역참에는 역역(驛役)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역리(驛吏)와 역노비(驛奴婢) 등을 포함한 다양한 역민(驛民)이 편성되어 있었으며, 역의 재정에 충당하기 위해 역위전(驛位田) 또는 마전(馬田)이 지급되었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유안역에는 역노 1명과 역마 1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찰방역(察訪驛)은 해주의 청단역(靑丹驛)이다.

변천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유안역은 산예도에 속한 10개의 속역 가운데 하나로, 서해도 청송현에 위치해 있었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의 역제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067년(고려 문종 21) 사이에 산예도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에 전국적인 역도-속역 체계가 마련되면서 청단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유안역은 해주의 청단역‧망정역(望汀驛)‧금강역(金剛驛), 배천의 금곡역(金谷驛), 연안의 심동역(深洞驛), 옹진의 문라역(文羅驛), 장연의 금동역(金洞驛)‧신행역(新行驛) 등과 함께 청단도에 속하였다. 그 뒤 세조 연간인 1462년(세조 8)에는 전국의 역로를 정비해 찰방(察訪)역승(驛丞)을 두는 과정에서 청단역‧남산역(南山驛)‧금곡역‧심동역‧신행역‧망정역‧금강역‧문라역 등 9개 역과 더불어 청단도찰방의 관할이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전기의 역참 제도가 완비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도 유안역은 여전히 청단도에 속하였다.

유안역의 위치는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여지도서』에 모두 송화현 동쪽 10리 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황해도 송화군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오일순, 「고려시대 역제의 변동과 잡색역」,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정요근, 「고려전기 역제의 정비와 22역도」, 『한국사론』45, 2001.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