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열군관(右列軍官)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후기 진무영(鎭撫營)의 장려(壯旅)와 의려(義旅)에 설치하여 강화도 방어를 담당하던 군관.

개설

우열군관은 1681년(숙종 7) 강화유수이선(李選)이 강화도의 방어를 맡기기 위해 진무영에 처음 설치하였다. 우열군관은 1694~1696년에 편찬된 『강도지(江都志)』에 의하면 500명이 설치되었고, 위급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동원되는 여군(餘軍)으로 편성되었다. 1708년 의려대(義旅隊)와 장려대(壯旅隊)가 만들어지면서 우열군관은 크게 증가하여 1779년(정조 3)에는 장려와 의려에 각각 999명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으로 진무영이 폐지되면서 우열군관도 혁파되었다.

담당 직무

『강도지』에 의하면 우열군관은 강화도의 특정 지역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강화도에 위급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동원되는 여군이었다. 따라서 덕진돈대 등의 파수를 담당한 좌열군관과 차이가 있다.

변천

1681년 강화유수이선은 강화도의 방어를 맡기기 위해 우열군관을 좌열군관(左列軍官)과 함께 진무영에 설치하였다(『정조실록』 3년 3월 8일). 우열군관은 『강도지』에 의하면 500명이 설치되었고, 1708년 교생(校生)과 원생(院生)을 의려대에, 그리고 장교를 장려대에 편성하면서 우열군관의 수는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우열군관은 1779년에는 장려와 의려에 각각 999명이나 배치되어 좌열군관과 마찬가지로 진무영에서 군액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무학(武學)속오군(束伍軍)으로 각각 1,332명이었다. 하지만 1895년 을미개혁으로 진무영이 폐지되면서 우열군관도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도지(江都志)』
  • 송양섭, 「17세기 강화도 방어 체제의 확립과 진무영의 창설」, 『한국사학보』13, 200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