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생(院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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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원에 소속된 유생.

개설

원생(院生)은 서원(書院)에 소속되어 유학을 공부하던 유생(儒生)이다. 16세기 중엽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서원은 사액(賜額)이 내려질 경우, 토지와 노비·서적 등을 하사 받고 면세와 면역(免役)의 특전이 주어졌다. 이에 따라 원생들은 양역(良役)을 면제 받는 혜택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원생이 되어 양역을 피하고자 하는 자들이 증가하자 서원은 각종 사회적 폐단의 온상으로 지목되고, 그동안 활발치 못했던 원생에 대한 본연의 강학(講學) 활동마저 더욱 침체되고 말았다.

변천

서원은 16세기 중엽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서원은 국왕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은 사액서원(賜額書院)과 비사액서원이 있었다. 사액서원은 1550년(명종 5)에 경상도 풍기에 설립된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사액을 받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사액서원에는 토지와 노비, 서적 등이 하사되고 면세와 면역의 특전이 주어졌다. 이에 따라 서원 소속의 유생들은 면역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원생은 서원 내에서 유학을 공부하며 보통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었다. 일부는 기숙하면서 생활하기도 하였으나, 서원의 재정 상태가 안정되지 않아 강학 등이 원만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조선중기 이래로 향교와 서원 등에는 양역(良役)을 피하려는 평민들이 쌀이나 포(布)를 납부하고 원생 명단에 기록되는 일들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서원에서는 이들을 구분하고자 동재유생(東齋儒生)에 대비하여 액내원생(혹은 서재생)이라 칭하며 받아들였다. 처음에 주어졌던 각종 특혜가 축소되어 가는 상황에서 재정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서원의 입장에서는 재정 충당을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이로 인해 양역의 폐단이 심화되자, 정부에서는 이를 바로잡고자 대과(大科)·소과(小科)에서 낙제한 낙강(落講) 유생을 군역에 충당하는 낙강충군(落講充軍) 제도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정부에서는 급기야 1704년(숙종 33)에 서재원생을 인정하고 액수를 제한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대현(大賢)의 서원은 30명, 사액서원은 20명, 비사액서원은 15명으로 정원을 정해 이를 공식화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교안(校案)에 수록토록 하여 엄격히 규제하였으며(『숙종실록』 37년 12월 26일), 사액의 요청에 대해서도 1713년(숙종 39) 7월에 이를 금지시켰다.

그런데도 군정(軍政)의 폐단은 근절되지 않았다. 향교와 서원에 법을 어기고 함부로 들어가 교생·원생으로 모록(冒錄)된 자를 엄격히 심사하여 퇴출시킬 것이 건의되기도 하였으나(『숙종실록』 44년 7월 8일), 원생에 있어서는 중앙 관료와 지방 유림의 긴밀한 이해관계가 얽혀 시행되지 못하였다. 도관찰사의 수령관(首領官)도사(都事)가 순강(巡講)할 때 원생들 또한 마땅히 교생과 함께 고강(考講)하여 정원 이외의 낙강자는 군역에 충당할 것이 다시 주장되었지만(『숙종실록』 45년 4월 30일), 이것도 현실적이지 못해 역(役)을 피하는 자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리하여 1719년에는 교생과 원생의 수가 가장 많은 고을의 경우 400~500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였다(『숙종실록』 45년 8월 16일).

역을 피하는 현상이 이처럼 만연한 가운데, 원생에 대한 강학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남해현감김한운(金翰運)은 양인을 강제로 원생에 소속시키고 수천냥의 돈을 받아 사리사욕을 채웠고(『영조실록』 1년 4월 25일), 과천과 홍주에서는 서원을 짓고 양정(良丁)을 모집하여 원생으로 만드는 등의 폐해가 기승을 부렸다(『영조실록』 1년 11월 13일). 또 안주목사송택상(宋宅相)은 교생이나 원생에게 뇌물을 받고 강(講)을 면제해 주기도 하였다(『영조실록』 2년 5월 28일).

이렇게 군정(軍丁)을 충당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영조는 원생의 폐단이 대부분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영조실록』 7년 12월 22일). 그렇지만 그 폐해를 줄일 수 있는 방도를 찾지 못한 채 향교와 서원 등은 양민이 쉽게 역을 피하는 소굴로 변해갔다(『영조실록』 26년 6월 5일). 이와 더불어 본래의 설립 목적인 모현(慕賢)과 강학의 면모는 퇴색하고, 양반 가문의 사익(私益)을 추구하려는 서원 설립이 범람하였다.

서원이 역을 피하는 소굴이라거나 양역 폐단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오자, 결국 서원은 사회적 폐단의 온상으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서원은 각종 비용 부담의 가중으로 경제적 기반은 열악해지고, 사회적·정치적 위신도 크게 추락하여 존립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고종 연간에 만동묘(萬東廟)를 시작으로 정비를 단행하여, 1871년(고종 8) 전국에 47개만 남겨 놓고 서원 모두를 철폐하였다.

참고문헌

  • 경기대학교 소성학술연구원, 『한국의 서원과 학맥 연구』, 국학자료원, 2002.
  • 정만조, 『조선시대 서원 연구』, 집문당, 1997.
  • 윤희면, 「조선시대 서원 정책과 서원의 설립 실태」, 『역사학보』181,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