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동궁(龍洞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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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회세자의 궁으로 임진왜란 이후 왕실에서 사용하는 내탕(內帑)을 마련하고 관리하던 궁가(宮家).

개설

용동궁은 순회세자(順懷世子)의 궁이었다가 그의 사후 왕실의 내탕고로 기능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명례궁(明禮宮)과 더불어 왕실 내탕 중 왕후 및 왕대비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하던 궁가이다. 현종대부터 고종 연간까지 꾸준히 그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1907년(융희 1) 도장(導掌)이 폐지되고, 순종 즉위 후 모든 재산을 제실에서 관리하기 시작했다(『순종실록』 즉위년 11월 27일). 용동궁이 있던 위치에 경운궁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위치 및 용도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덕수궁 내에 있었다. 이곳의 조선시대 행정 구역은 한성부 남서(南署) 황화방(皇華坊)이다. 영조대인 1743년(영조 19)에는 용동궁의 대문이 대정동(大貞洞)으로 나 있으며 명례궁과는 서로 가까웠다고 한다. 용동궁은 명례궁과 더불어 왕후 소용의 내탕(內帑)을 관리하고 조달하는 궁가의 기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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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언제 설치되었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1864년(고종 1)에 작성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서부 황화방에 있으며 세상에 전하기를, 순회세자의 옛날 궁이라고 하지만 잘 알 수 없다.’ 하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용동궁이 순회세자의 옛 궁이라는 설(說)이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전혀 이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

용동궁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모두 왕실 소용의 내탕을 수급하고 관리하는 것에서 빚어지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용동궁의 내탕 소속에 관해서는 숙종 연간에 중궁(中宮), 영조 연간에는 왕대비, 정조 연간에는 자궁(慈宮)으로 기록하고 있어 지속적으로 동조(東朝) 소용의 내탕을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1907년(융희 1)에 내수사·어의궁·명례궁·수진궁·육상궁·경우궁·선희궁과 더불어 도장(導掌)이 폐지되고, 순종이 즉위한 후 제실 재산 정리국 관제(帝室財産整理局官制)가 발표되면서 모든 재산을 제실에서 관리하기 시작했다. 고종대 경운궁이 들어서면서 용동궁은 훼철되었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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