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영(甕營)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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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옹영 |
한글표제 | 옹영 |
한자표제 | 甕營 |
상위어 | 수영(水營) |
동의어 | 황해수영(黃海水營), 옹진수영(甕津水營), 옹진부수영(甕津府水營) |
관련어 | 수사(水使)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이규철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옹영(甕營)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44년 6월 3일, 『숙종실록』 44년 12월 6일 |
황해도 옹진부에 설치한 수영(水營)의 별칭.
개설
황해도 옹진부에 설치한 수영의 별칭이다. 옹진영(甕津營), 옹진수영(甕津水營), 옹진부수영(甕津府水營) 등으로 불렸다. 1457년(세조 3) 전 국토를 방위체제화하는 진관체제(鎭管體制)가 실시되면서 각 도의 수군지휘관 명칭이 수군절도사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수군절도사를 수사(水使)로 부르기도 했다. 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에는 전임수사 1명과 겸임수사 1명을 배치했다. 이때 겸임수사는 대부분 관찰사가 담당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전임수사 2명이 배치되었다. 의주나 평양 등에도 수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보통 전임수사가 근무하던 곳을 수영이라 했다.
아울러 수영을 중심으로 한 수영취락(水營聚落)이 형성되기도 했다. 수영취락은 주로 만(灣) 연안의 구릉지에 위치해 수군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군병은 해안의 지세와 조수에 밝은 취락 주민들로 충당되었다. 주민들은 둔전(屯田)을 경작하면서 자급자족하고 취락을 유지했다. 가장 대표적인 취락은 통제영(統制營)이 있던 전라도 여수 지역의 취락이었다. 특히 돌산(突山)은 여수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서 대단위 취락을 형성했으며, 평지에 돌로 쌓아 조성한 방형의 성곽인 석보(石堡)는 여수반도의 경제적 중심지 구실을 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황해수영은 숙종대에 설치되었다. 옹진 사람 윤개(尹鍇)는 조정에 글을 올려 옹진은 고을이 작고 백성들이 적은데도 부과된 역이 번거롭고 무겁다는 점과 청나라의 배들이 자주 출몰하는데도 해변의 방어체제가 허술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울러 윤개는 교동(喬桐)의 제도에 의하여 소강(所江)의 방어영(防御營)을 황해수사(黃海水使)로 올리고 옹진현을 혁파하여 수영에 합쳐달라고 강력하게 건의했다. 이후 충청수사최진한(崔鎭漢) 역시 자신이 소강에서 관직을 역임할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옹진에 수영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두 사람의 의견에 따라 소강첨사(所江僉使)를 올려 수사로 삼고, 옹진현감을 부사(府使)로 삼았다. 그리고 수사로 하여금 겸임하여 황해도 일대를 관리하도록 조치하니 해당 지역의 백성들이 상당히 편리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확인된다(『숙종실록』 44년 6월 3일).
이로부터 6개월 후인 1718년(숙종 44) 12월 사헌부는 황해도의 수영을 새로 설치하는 역사를 진행할 때 사업의 초기에 수영의 규모와 관련된 조치를 취하는 일이 다른 수영의 수사가 장부를 조사하여 대신 위임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업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새로운 수영의 수사로 임명된 박창윤(朴昌潤)은 능력이 평범하고 대수롭지 않은 인물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관직을 역임하면서도 별다른 공적이 없었으니 해직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숙종실록』 44년 12월 6일). 사헌부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당시 조선이 가지고 있던 황해수영의 새로운 설치 계획 등의 일단을 파악할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 진관 편성표를 참고하면 조선초기에는 다음의 지역들에 수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경기도 남양(南陽) 화량만(花梁灣), 충청도 보령, 경상도 동래에 좌수영·가배량(加背梁)에 우수영, 전라도는 순천 오동포(烏桐浦)에 좌수영·해남에 우수영을 설치해두었다.
각각의 수영은 모두 주위에 석성(石城)을 구축하여 해양 방위에 임하고 있었으나, 조선초기의 수군 편성은 지역방위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각 도의 수영에는 인원 차출, 병선 건조, 무기 제조, 수군 훈련, 병선 수리, 둔전과 염전 운영 등의 중요한 임무들이 부여되어 있었다. 하지만 수군 병력에게 군사적 역할은 물론 둔전과 염전의 운영이나 세곡의 운반과 같은 임무까지 부여하다 보니 고된 신역으로 인식되어 이를 피하려는 백성들이 점차 증가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군사상의 취약점을 고려하여 통제영(統制營)이 설치되고 인조대에는 통어영(統禦營)이 설치되기도 하였으나, 수사가 지휘하는 수영의 업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다만 군사상의 이유나 행정적 조치를 위해 수영의 위치가 옮겨진 곳들은 있었다. 1907년 군대해산령에 의해 각 도의 수영은 폐쇄되었으나, 지금까지도 수영이 있었던 곳은 그 명칭과 함께 흔적을 남겨두고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군국총목(軍國總目)』
- 『만기요람(萬機要覽)』
- 『황해수영보첩(黃海水營報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