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진(寧邊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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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의 영변 지역에 설치한 지방 방위 조직인 진관.

개설

1428년 평안도의 연산부(延山府)와 무산현(撫山縣)을 병합하여 영변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 한자 추가)라 칭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부사로 하여금 병마도절제사를 겸하게 하면서 병영을 두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격이 올라가 토관직도 설치되었다. 곧 군익도(軍翼道)체제로 편입되면서 영변도(寧邊道)가 수립되었다. 그 뒤 군익도체제의 전국 확대와 진관(鎭管)체제로의 개편 과정을 거쳐 1457년에 정식으로 진관이 세워졌다. 소속 진의 이동과 같은 약간의 변화를 겪은 뒤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지방 군제가 크게 바뀌었는데 병영이 안주로 옮겨가면서 위축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428년(세종 10) 평안도의 연산부와 무산현을 병합하여 영변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 한자 삭제)라 칭하고, 부사(府使)와 판관(判官)을 두고, 병마도절제사로 하여금 부사를 겸임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0년 12월 2일). 아울러 서반 토관직(土官職)을 설치하여 변민(邊民)이 기꺼이 이주해서 큰 진(鎭)을 이루도록 했다(『세종실록』 11년 3월 26일). 이는 야인의 침입에 대비하면서 본격적인 북방 진출을 꾀하기 위해서였다.

영변진(寧邊鎭)이 설치되자 곧 평안도의 군익도에 편입되어 처음 삭주도(朔州道)의 중익(中翼)에 속했다가 얼마 뒤 박천(博川)·안주(安州)·순천(順川)과 함께 안주도(安州道)의 중익으로 옮겨졌다(『세종실록』 11년 2월 5일). 하지만 병영(兵營)이 있었기 때문인지 곧 영변도로 호칭이 바뀌면서 먼저 있던 순천·박천은 삭주도(朔州道)로 옮겨졌다. 그 대신 평양도(平壤道) 소속의 삼등(三登)·고강동(古江東)을 넘겨받았다(『세종실록』 17년 12월 9일).

사군(四郡)이 설치된 이후 평안도의 중앙이 되어 연변(沿邊) 지역과 멀리 떨어지게 되자 적이 침입하면 구원하기 힘들어졌다. 이에 병영을 강계부(江界府)로 옮겼다(『세종실록』 24년 3월 2일). 그에 따라 대도호부에서 도호부로 강등되었고, 판관이 혁파되었다. 조금 뒤에 다시 병영이 옮겨와 판도호부사가 병마도절제사를 겸하면서 판관을 다시 설치하였다[『세종실록』 29년 10월 29일].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영변도의 중익에 영변, 안주, 순천, 박천, 좌익에 성천(成川), 맹산(孟山), 은산(殷山), 양덕(陽德), 우익에 강동, 숙천(肅川), 자산(慈山), 영유(永柔)가 소속되었다.

1450년(세종 32) 다시 병마도절제사를 없애고 관찰사가 겸임하게 했다가 1453년(단종 1)에 회복시켰다. 1455년(세조 1) 양계(兩界)의 군익도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연해뿐만 아니라 내륙에도 거진(巨鎭)을 두고 주변 고을을 분속시켰다. 영변도에는 중익에 영변·가산, 좌익에 희천·운산, 우익에 태천·박천이 소속되었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군익도체제를 진관체제로 개편하면서 주요 지역을 거진으로 삼고 주변의 진들을 그 휘하에 소속시켰다. 이로 인해 영변진이 설치되었는데, 처음에 박천·개천·덕천·은산·맹산·희천이 영변진에 속하였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그 뒤 박천이 의주진 소속으로 바뀌는 등의 변동을 거쳐 진관이 확립되었다. 이것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되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 의하면 정3품 영변대도호부사가 병마절도사를 겸하였다. 그에 소속된 운산·희천·박천에는 군수가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를, 영변판관과 태천현감이 종6품의 병마절제도위를 겸하였다.

중앙에 올라가 대열(大閱) 등에 참가했을 때에는 오위(五衛)에 소속되고, 우위(右衛)였던 호분위(虎賁衛)의 전부(前部)에 속하였다. 가을과 겨울철 방어가 긴박할 때는 병마절도사가 보통 창주(昌州)로 가서 변란에 대비했으며, 판관이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홀로 진을 지키도록 했다(『선조실록』 35년 10월 15일).

광해군대에 부사용한교(韓嶠)가 올린 상소에 따르면, 압록강 일대 각 읍을 일위독진(一衛獨陣)으로 만들어 외적을 지키되, 본도(道)의 내지 황해도의 군사를 합하여 윤번제로 들어가 지키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변방에 경보가 있을 것을 대비해 안팎에서 서로 구원하고자 영변 등 5개의 진관을 설치하여 오위연진(五衛連陣)의 제도를 만들었다. 혹시라도 변성(邊城)이 수비를 못 하게 되면 주현의 군민이 각각의 소속 진관에 들어가 방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광해군일기』 3년 3월 29일).

변천

임진왜란 이후 지방 군제를 개편하면서 진관체제에도 변화가 생겼다. 광해군대에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던 박엽(朴燁)이 5진 대신 7진을 배치하면서 영변·성천·귀성·평양 등의 4진이 폐지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에 복구되었다(『인조실록』 3년 7월 6일). 1627년(인조 5)에는 병영이 안주로 옮겨 가면서 급속히 침체되었다[『인조실록』(한 칸 띄움)11년 11월 17일 2번째기사]. 이후 노비가 주인을 살해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현(縣)으로 강등시키기도 했다(『효종실록』 4년 3월 6일).

하지만 방어의 요지였던 관계로 곧 영변진으로 회복되고, 천수진(天水鎭)이 휘하에 속하게 되었다(『숙종실록』 7년 11월 27일). 대신 박천이 나가면서 진관의 소속 진들에 변동이 생겼다. 그 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이르러서 운산·희천의 병마동첨절제사는 남았고 천수는 혁파되었으며, 병마절제도위는 모두 삭감되었다.

한편 지방군을 강화하고자 영장제(營將制)를 도입하면서 처음에는 전임 영장을 두었다. 그러나 비용이 과다하다는 이유로 폐지하고 병자호란 이후에 하삼도, 즉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제외하고는 수령에게 영장을 겸임하게 했다. 1722년(경종 2) 청천강(淸川江) 남북의 영장을 9명에서 5명으로 줄이고 모두 토포사를 겸하게 하였다. 이때 영변진은 수령에게 수성장(守城將)을 겸하게 했다(『경종실록』 2년 3월 13일). 하지만 다시 9명으로 늘어나면서 『속대전(續大典)』에 이르러 영변부사가 별후영장을 겸하도록 규정하였다. 아울러 토포사를 겸하게 되었으며(『영조실록』 8년 10월 20일), 안주의 경우에는 4부(部)를 설치하여 변방의 요새를 웅장하게 만들었다(『영조실록』 22년 10월 8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혜안, 1999.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전기편 -』, 1968.
  • 차문섭, 『조선시대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