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좌(緣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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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범죄 행위에 대해 행위자인 범인에게만 책임을 묻지 않고 이를 확대하여 범인의 부자, 형제 등 혈연관계가 있는 자들 전체에 대해 연대책임(連帶責任)을 묻는 것. 부계친족(父系親族)만이 아니라 외손(外孫) 등 모계친족(母系親族)과 사위·며느리 등 인척(姻戚) 관계에 있는 자까지 확대됨.

개설

근대 사회에서는 개인 책임이 원칙으로 연좌는 금지된다. 그렇지만 집단 중심의 생활을 영위하는 전근대 사회에서는 개인이 아닌 구성원 전체에 대해 책임을 물었다. 즉 개인의 행위에 대해 구성원 전부에 대해 책임을 물음으로써 개인에 대한 구속력과 범죄에 대한 억제력을 강화할 수 있다.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범죄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개략적으로 연좌에 해당하는 친족은 부자(父子), 처첩, 모녀, 조손, 형제자매, 백숙부, 형제의 자 등이고, 형벌은 교형, 유형, 노비로 삼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대명률』에 근거하면서도 조선적 특징을 반영하였는데, 노비는 공천으로 하였고, 실제로 연좌를 적용할 때에는 범위를 축소하고 형벌을 감경하였다. 또 독자적으로 개별 사건을 해결하면서 연좌에 해당하는 수교를 정립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중국과는 다른 조선 고유의 근친 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연좌에 해당하는 친족은 최근친(最近親)으로 상례에 근거한 오복친(五服親)보다 훨씬 협소하다.

연좌(緣坐)와 유사하거나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는 가족체수(家族替囚), 전가사변(全家徙邊), 가산적몰(家産籍沒), 노륙법(孥戮法) 또는 전가위노(全家爲奴), 자손에 대한 금고(禁錮) 등이 있다.

‘가족체수’는 가장(家長)이 죄를 지었을 때 부조(父祖)나 남편, 주인 등 가장을 대신하여 자·손(子·孫), 처, 노 등을 대신 구금하는 것이다. 특히 자손을 위하여 부조가, 처를 위하여 부를 구금하는 것은 명분에 어긋나기 때문에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는 이를 금지하고, 다만 비속(卑屬)이 존속(尊屬)을 위하여 구금되는 것만 허용하였다.

‘전가사변’은 가장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을 경우에 사형을 면제하고 그 대신에 전 가족을 북방의 변지로 강제 이주시켜 국경을 튼튼히 하기 위한 조처였다. 초기에는 일반인을 강제로 이주시켰으나 도망하는 등 실효가 없어서 범죄인을 사민(徙民)시켰다. 처음에는 전가사변으로 처벌하는 범죄가 적었으나 연산군대 이후로는 급증하였다. 또 사족은 전가사변으로 처벌할 수 없도록 하여 신분제를 강화하였다. 전가사변은 영조가 『속대전』을 편찬하면서 폐지하고 형벌은 장 100·유 3,000리로 대체하였다.

‘가산적몰’은 죄인의 전 재산을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가족 단위로 가장을 중심으로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당시에는 전 재산의 몰수는 사실상의 형사처분이라고 할 수 있다. ‘노륙법’ 또는 ‘전가위노’는 범인의 전 가족을 노비로 삼는 것이다. 이 역시 형사처분으로, 본인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또 신분이 강등된 점에서 연좌와 같다.

연좌(緣坐)와 구별해야 하는 것은 연좌(連坐)이다. ‘연좌(緣坐)’는 혈연관계나 인척 관계에 있는 자의 범죄 행위에 대해 연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다. ‘연좌(連坐)’는 혈연 등의 관계가 없지만, 공무를 수행하면서 저지른 범죄나 범죄 행위자를 추천하는 등의 직무와 관련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다. 즉, 연좌(緣坐)는 출생과 혼인 등으로 본인의 직접적인 의지 내지 의사와 관계없이 발생하는 것임에 반해, 연좌(連坐)는 공무를 수행하면서 관리·감독의 소홀, 잘못된 추천 등 본인의 행위가 게재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내용 및 특징

본인의 행위가 아닌 근친의 행위에 대해 공동으로 책임을 지는 연좌는 범죄에 대한 억제력이 강력하였다. 그래서 법에는 국왕이나 국가에 대해 위해를 가하는 행위인 모반(謀反)·모대역(謀大逆)·모반(謀叛)과 사회적 위험도가 높고 잔인한 독물을 제조하는 행위, 한 집안의 3명을 살해하거나 토막 살인하는 범죄에 연좌를 규정하였다. 조선에서는 인신위조나 강절도와 그 와주(窩主), 사민(徙民) 도주자에 대해 확대·적용하였다. 그러나 실제 적용에서는 사건 발생 당시의 여러 사정에 따라 확대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부녀의 범죄에 대해 남편을 연좌하였고, 출계하여 연좌의 대상이 아닌 친자도 연좌시켰다. 이렇게 연좌를 확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흠휼 정신에 따라 어느 정도 절제하였다.

변천

개인이 아닌 가족 집단에 대해 책임을 묻는 연좌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중국 고대 형법을 종합하고 후대에 직접 영향을 미친 『당률』과 조선에 직접 적용된 『대명률』 상의 연좌를 보기로 한다.

『당률』에서 연좌 대상의 범죄와 형벌 및 연좌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천자(天子)나 종묘(宗廟)사직(社稷) 등 상징물에 대해 위해(危害)를 가하는 행위인 ‘모반(謀反)’으로, 본인은 참형이며, 부자(父子)는 사형, 모, 딸, 처첩, 자의 처첩, 형제자매는 노비로 삼았다. 이는 이전보다 연좌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16세 미만의 자, 남 80세 이상 또는 독질(篤疾), 여 60세 이상 폐질(廢疾), 혼인하거나 약혼한 딸, 출계한 아들, 승려 등이 된 자, 약혼만 하고 성혼하지 않은 상태의 며느리는 연좌에서 제외되었다.

둘째, 왕조에 반대하여 외국이나 반란군에 투항하는 ‘모반(謀叛)’으로, 본인은 참형 또는 교수형이며, 부모와 자손은 유 2,000리이다. 하지만 규모가 큰 경우에는 모반(謀反)으로 처벌하였다. 강제로 동원된 자나 처, 15세 이하의 자는 속형(贖刑)을 하였다.

셋째, 대량 살상이 가능한 독물을 제조하거나 전수한 경우[造畜蠱毒]로, 본인은 교수형에 처하고 동거 가족은 유 3,000리로 처벌하였다. 나이 80세 이상, 10세 이하 및 독질로 유형에 동반할 가족이 없으면 연좌를 면제하였고, 고독에 감염된 자 역시 면제하였다.

넷째, 사죄에 해당하지 않은 한 집안의 사람 3인 이상을 살해하거나[殺一家三人] 토막 살인을 한 경우[採生折割人] 역시 연좌에 해당하는데, 본인은 참수형이며 처자는 유 2,000리이다.

연좌에 해당하는 범죄는 모두 10악(十惡)에 해당하는 중대 범죄였다. 『당률』의 이러한 규정은 『명률』에 그대로 계승되었는데, 다음 표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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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률』은 본인을 능지처참(陵遲處斬)으로 처벌하고, 개별적으로도 연좌를 인정하며 그리고 재산의 몰수 등을 규정하는 등 『당률』보다 엄하게 처벌하였다.

『대명률』의 규정은 조선에서 실제로 적용되면서 변용을 겪었다. 우선 모반·모대역·모반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적용에 변동이 있었으며, 특히 연좌의 범위와 대상도 달라졌다. 이는 ‘난언(亂言)’으로 정립되고 정치적 격동기를 거친 후에 『경국대전』「형전」 추단조에는 정리(情理)가 박절한, 즉 범죄의 정상이 나쁜 경우에만 가산을 몰수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연좌는 친족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으로 친족의 범위 내지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명률』에서 연좌에 해당하는 친족은 부자, 처첩, 모녀, 조손, 형제자매, 백숙부, 형제의 자 등이다. 또 형벌은 사형에서 유형 그리고 공신가의 노비로 삼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공노비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노비는 세전(世傳)되고 16세에서 60세까지 복무하는 등 중국에서의 노비와 같지 않아 『대명률』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었다. 그 해결책으로 우선 형제의 자는 부인 형제가 공천(公賤)이 되어도 공천으로 하지 않고 율문에 따라 유 3,000리로 처벌하고, 이 사건 발생 때 출생하지 않은 조카는 연좌하지 않았다. 또 16세 미만으로 공천이 되지 않은 자라도 천인으로 삼았다. 연좌로 공천이 된 후 60세가 되면 면역은 하되 지방에 계속 거주하게 하였고, 16세 미만인 자는 16세가 되면 공천으로 삼았다. 또 연좌인이 원래 천인인 경우에는 공천으로 삼는 것은 처벌이 아니기 때문에 환경이 열악한 변방의 관노비로 삼았다.

조선초기 연좌의 실제는 『대명률』 율문보다 가벼웠다. 반역의 경우, 형벌도 가벼웠으며 범위도 좁았고, 나중에 사면을 통하여 신분 등을 복구시켰다.

『대명률』에는 연좌 대상자 가운데 면제자를 "다른 집으로 출계한 자, 약혼만 하고 성혼에 이르지 않은 처, 약혼한 딸"로 규정하고 있다. 솔서혼속(率壻婚俗)에도 불구하고 딸은 친딸만이 아니라 자매도 연좌에서 면제되었다.

연좌를 확대·적용하는 조선 고유의 율문도 등장하였다. 그 최초는 인신위조이다. 『대명률』에는 본인만 참형일 뿐이나, 1469년(예종 1)에 처자를 지방 노비로 삼았으며 이는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사민 정책에 의해 사민이 되었다가 도망을 하면 본인은 참형에 처하고 처자는 잔역(殘驛)의 노비로 삼았으며, 이를 받아준 자도 전가사변에 처하였다. 이는 너무 엄격한 형벌로 실제로는 완화되어 시행되었다. 세종대에 도적이 성행하자 이를 막기 위해 강절도와 그 와주(窩主)를 처벌하고 가족을 전가사변에 처하며, 또 가사(家舍)를 몰관하였다. 이는 『경국대전』「형전」 장도(贓盜)조에 강도의 처자는 거주지의 관노비로 삼고, 강도의 와주는 사형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처벌한 후에 전가사변으로 처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또 정형(正刑)이 아니라 관직 진출의 제한인 금고(禁錮)도 연좌의 일종이다. 초기에는 사초(史草)를 바치지 않는 자의 자손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제한하였는데, 이는 『경국대전』 편찬 전에 폐지되었다. 그리고 장리(贓吏)의 후손도 역시 그러하였다. 이 경우에는 외손도 해당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 법은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고려말의 법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연좌의 범위는 그대로 유지되면서 다만 진출이 제한되는 관직만 줄어들었다.

조선후기에는 연좌의 대상이 늘어갔는데, 이는 형법의 독자성이 발현된 결과이다. 율문에는 범죄 주체를 남성만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부녀의 범죄에 대해 남편을, 율문과 달리 출계한 친자도 연좌하였다. 그러나 연좌의 대상이 확대되었지만, 흠휼 정신에 따라 절제한 모습이 『속대전』에 보인다.

의의

연좌는 국가적·사회적 위험성이 높은 특정한 범죄에 대해 행위자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근친 전부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다. 『대명률』에 규정된 연좌 범죄는 10악에 해당한다. 조선에서도 범죄의 근절 등 정책적 목적 달성을 위해 연좌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실제 적용은 율문과는 다른 관대한 모습이 보인다.

오형에 해당하는 형벌만이 아니라 노비로 삼는 것, 가산의 몰수, 전가사변, 자손금고 등도 광의의 연좌에 포함시킬 수 있으며, 이의 적용을 둘러싸고 중국과는 다른 조선 고유의 사정이 반영되었다. 연좌에 해당하는 친족은 복제와는 달리 근친에 국한되며, 실제의 적용에서는 고유의 친족 범위 내지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참고문헌

  •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金鐸敏·任大熙 主編, 『譯註 唐律疏議』(전3책), 한국법제연구원, 1994,1997,1998.
  • 金斗憲, 『韓國家族制度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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