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도(時興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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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충청우도의 온양·신창·예산·덕산·면천·당진·아산·태안 등지에 설치된 역을 관할하던 역도.

개설

시흥도(時興道)는 금정도(金井道)·이인도(利仁道)와 함께 조선시대 충청우도에 편성된 역도(驛道) 중 하나였다. 조선전기 세종대에 전국적으로 역로(驛路)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고려시대에 충청주도(忠淸州道)에 속했던 장세역(長世驛)·이흥역(理興驛)·일흥역(日興驛) 등을 통합·개편하면서 시흥도를 설치하였다. 시흥도에는 세종대부터 역승(驛丞)이 파견되었으나, 1535년(중종 30)부터는 종6품의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역무(驛務)를 관할하였다. 시흥도는 이후에 금정도에 통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시흥도는 조선 세종 연간에, 고려시대의 역도인 충청주도에 소속된 역들을 통합·개편하면서 성립되었다. 세종대에는 전국적으로 역도-속역 체제를 갖추었는데, 이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시흥도에는 시흥역(時興驛)·창덕역(昌德驛)·일흥역(日興驛)·장시역(長時驛)·화천역(花川驛) 등 5개의 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세종대의 역도 체계는 그 뒤 세조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개편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시흥도에는 기존 역 외에 급천역(汲泉驛)·순성역(順城驛)·흥세역(興世驛)이 추가로 소속되었다. 시흥도에 소속된 8개 역은 모두 소로(小路)에 해당하였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기록된 각 역촌의 호구·인구, 역민의 구성 및 역마의 배속 상황은 다음의 <표1>과 같다. 다만 『여지도서』가 편찬되었을 당시 시흥도는 금정도로 통합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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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1457년(세조 3)에는 이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에 있는 역의 관할을 조정하고 정역찰방(程驛察訪)을 두었는데, 이때 충청도의 이인도·시흥도·금정도에 속한 모든 역을 이인도로 통합시켰다(『세조실록』 3년 9월 12일). 1460년(세조 6)에는 경기도와 하삼도(下三道)의 역도를 각 역의 거리를 고려해 개편하면서, 이인도에 속한 10개 역과 금정도에 속한 12개 역, 그리고 시흥도에 소속된 5개 역을 다시 이인도로 통합하여 이인도찰방이 관할하게 하였다(『세조실록』 6년 2월 5일). 그러나 이 역도는 그대로 존속되지 않았는데, 찰방이 관할하는 역이 많고 역 간 거리가 먼 까닭에 순시하기가 어려워 역로가 점차 쇠퇴하는 등의 폐단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462년(세조 8)에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해 찰방과 역승을 두게 하면서, 시흥도의 관할은 시흥도역승이 맡아보게 하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시흥도에 속한 8개 역 가운데 시흥역·창덕역·장시역·화천역이 먼저 금정도로 이속되었고, 다시 나머지 역까지 모두 이속되면서 시흥도는 완전히 금정도로 병합되었다.

한편,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유형원(柳馨遠)은 1670년(현종 11)에 완성한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역의 설치 기준에 따른 역의 이설(移設)과 역도의 재편을 주장하였다. 시흥도와 관련해서는, 시흥도를 폐지한 뒤 속역인 일흥역·급천역·순성역·흥세역은 금정도에 분속하고, 그 대신 금정도에 소속된 시흥역·창덕역·장시역·화천역은 성환도(成歡道)로 합속할 것 등을 제안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시흥도에 소속되었던 일부 역이 이미 금정도로 이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여지도서』·『만기요람(萬機要覽)』·『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는 시흥도에 남아 있던 일부 역까지 모두 금정도에서 관할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17세기 무렵에는 시흥도가 완전히 금정도에 통합된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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