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철(宋時喆)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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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송시철 |
한글표제 | 송시철 |
한자표제 | 宋時喆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현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보숙(保叔), 숙보(叔保) |
호 | 설촌(雪村)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10년(광해군2) |
사망 | 1673년(현종14) |
본관 | 여산(礪山)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영평(永平) 조양리(助良里) 금주산(金柱山) |
증조부 | 송세인(宋世仁) |
조부 | 송초(宋礎) |
부 | 송극인(宋克訒) |
모_외조 | 청풍김씨(淸風金氏): 김흡(金洽)의 딸 |
처_장인 | 동래정씨(東萊鄭氏): 정지경(鄭之經)의 딸 →(자녀)7남 |
자녀 | (1자)송광엄(宋光淹) (2자)송광렴(宋光濂) (3자)송광순(宋光洵) (4자)송광준(宋光浚) (5자)송광연(宋光淵) (6자)송광택(宋光澤) (7자)송광속(宋光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송시철(宋時喆) |
총론
[1610년(광해군2)∼1673년(현종14) = 64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의 문신. 자는 보숙(保叔) · 숙보(叔保)이고, 호는 설촌(雪村)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인데,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의송극인(宋克訒)이고, 어머니 청풍김씨(淸風金氏)는 사재감 첨정(僉正)김흡(金洽)의 딸이다. 사헌부 감찰(監察)송초(宋礎)의 손자이고, 동래부사(東萊府使)송상현(宋象賢)과 8촌간이었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33년(인조11)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음보로 헌릉(獻陵)참봉(參奉)을 제수 받고, 종묘서(宗廟署)부봉사(副奉事), 상서원(尙瑞院)부직장(副直長)으로 전직되었으며, 다시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으로 있다가 뜻밖의 실수로 인하여 임피현(臨陂縣)으로 귀양갔다. 귀양살이 중에 모친상을 당하여 돌아와서 상례를 치렀다. 복제(服制)를 끝마치고 내자시(內資寺)주부(主簿)에 임명되고,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을 거쳐, 공조 좌랑으로 전임하였다.
1653년(효종4)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4세였다.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1654년(효종5)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서 형조 좌랑으로 전임되었다. 고산찰방(高山察訪)으로 나갔다가 다시 정언에 임명되었으며,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로 나갔다가, 1657년(효종8) 예조 정랑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고,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로 전임되어 송준길(宋浚吉)이 경연(經筵)에서 시강할 때 그를 많이 도왔다.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어,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밀양부사(密陽府使)가 되었다. 1659년(효종10) 효종이 승하하자, 밀양부의 사람들이 대부분 북소리를 듣고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부사송시철이 방(榜)을 내걸고 대의(大義)로써 그들을 타이르자, 나중에 회곡(會哭)할 때 부민들이 모두 나와서 곡하였다. 1년 남짓 근무하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종 시대 활동
1661년(현종2)부터 1665년까지 사간원 헌납(獻納)을 6차례, 사헌부 장령을 11차례, 집의(執義)를 8차례, 사간원 사간(司諫)을 5차례 각각 역임하였다. 그 사이 상의원(尙衣院) · 사복시(司僕寺) · 장악원(掌樂院) · 봉상시(奉常寺) · 군자감(軍資監) 등 제사(諸司)의 장(長)도 각각 역임하였다. 1664년(현종5) 사간원 사간으로 근무할 때 사헌부 장령이무(李堥)가 재상에 처음 임명된 허적(許積)이 인망(人望)에 부합하는 인물이 아니라고 논박하다가 엄한 견책을 받았다. 송시철은 그를 구원하다가 현종의 노여움을 사서 평안도 의주(義州)로 유배되었으나, 영상정태화(鄭太和) 등의 건의로 형벌을 경감하여 삭탈관직되었다. 1665년(현종6) 특별히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는데, 이때 현종이 온천(溫泉)에 거둥할 때 어가(御駕)를 호종(護從)하였다. 임금이 병환이 나았다고 그에게 가자(加資)하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형조 참의가 되었다가, 다시 좌부승지가 되었으며, 1666년(현종6) 좌승지가 되었고, 1668년(현종6) 병조 참지가 되었다. 1670년(현종11)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나가서 향교를 수축하고, 부역(賦役)을 경감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의 묘사(墓舍)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1673년(현종14) 7월에 관사(官舍)에서 죽으니, 나이가 64세였다.
성품과 일화
송시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사람됨은 너그럽고 온화하며 순후(淳厚)하였다. 자신을 경계하는 데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어서, 날마다 반드시 새벽에 일어났는데, 비록 병중이더라도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빗질하였으며, 늙어서도 게으른 적이 없었다. 성품도 매우 조용하였고, 절대로 자기가 요직(要職)에 있다는 티를 나타내지 않았고, 공무(公務)를 집행할 때에는 한결같이 절도가 있었고, 주야(晝夜)로 삼가고 조심하였다. 현직(顯職)에 출세하였으나 오직 선대의 유업(遺業)을 삼가 지켜 서까래 하나 밭뙈기 하나도 증식한 바가 없었고, 자기의 좋은 논밭을 남에게 빼앗기게 되어도 또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사귀는 친구들에게 종신토록 마음을 바꾸지 않고 친구가 죽으면 그 자식들을 보살펴 주었으므로, 그와 교유(交遊)한 자들 가운데 그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그가 죽자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영평(永平) 조양리(助良里) 금주산(金柱山) 산기슭의 선영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되었다. 김수항(金壽恒)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목사(牧使)정지경(鄭之經)의 딸인데, 자녀는 7남을 두었다. 장남 송광엄(宋光淹)은 의금부 도사(都事)를 지냈고, 그 아들 송징은(宋徵殷)은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참판을 지냈다. 3남 송광순(宋光洵)은 현감(縣監)을 지냈고, 그 아들 송교명(宋敎明)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냈다. 5남 송광연(宋光淵)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와 이조 참판을 지냈고, 그 손자 송인명(宋寅明)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문곡집(文谷集)』
- 『동계집(桐溪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서계집(西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典)』
- 『연도기행(燕途紀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주유고(龍洲遺稿)』
- 『탄옹집(炭翁集)』
- 『백호집(白湖集)』
- 『정관재집(靜觀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