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召試)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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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소시 |
한글표제 | 소시 |
한자표제 | 召試 |
상위어 | 과거(科擧) |
하위어 | 추소시(追召試) |
관련어 | 예문관(藝文館), 회권(會圈), 사관(史官) |
분야 | 정치/인사/선발 |
유형 | 법제·정책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시행시기 | 1741년(영조 17) |
시행기관 | 예문관(藝文館)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소시(召試)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17년 4월 25일, 『영조실록』 17년 9월 14일, 『영조실록』 18년 7월 6일, 『영조실록』 22년 1월 13일, 『영조실록』 20년 6월 5일, 『영조실록』 20년 8월 29일, 『영조실록』 19년 11월 20일, 『영조실록』 24년 11월 26일, 『영조실록』 24년 12월 1일, 『영조실록』 17년 12월 10일, 『영조실록』 18년 8월 8일, 『영조실록』 25년 8월 21일, 『영조실록』 39년 12월 18일, 『영조실록』 48년 6월 23일 |
조선후기 시험을 통하여 예문관 소속 사관을 선발하던 제도.
개설
소시(召試)란 왕이나 고위 관원이 특정 관원을 불러서 시험을 본다는 일반적인 의미의 용어로 이미 조선전기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1741년(영조 17) 이른바 한림소시법(翰林召試法)이 제정되면서부터 주로 사관(史官)을 선발하는 제도로 불리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사관의 선발은 자천제(自薦制)로 이루어졌다. 사관의 자천은 결원이 있을 때 시행되는데, 대개 1년에 1~2회 정도였다. 대상자는 집안이나 학식·인망 등을 고려하여 7품 이하의 관원 가운데 추천하였다. 자천이 되면 회천(回薦)과 분향(焚香) 등의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취재(取才) 단계를 거쳐 사관이 될 수 있었다. 이때의 취재는 의정부의 영의정을 비롯하여 이조(吏曹)의 당상관 등이 참석하여 시행하는 시험이었다. 회천이란 현직 사관이 자천한 대상자를 전임 사관이 모여 권점(圈點)하고, 이를 대신이나 관각당상(館閣堂上)이 가부를 논하는 것이었다. 분향은 회천 이후 사관 후보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하였다.
이러한 사관의 자천제는 붕당 형성 이후 자신의 붕당 구성원을 중심으로 추천하고 반대 붕당에 의한 저지가 이루어지는 등 당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에 영조대 탕평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사관의 자천제는 당론의 소굴로 지목되었다. 결국 1741년(영조 17) 4월 25일 이조(吏曹) 전랑(銓郞) 통청권의 혁파와 함께 한림소시법으로 개편되었다(『영조실록』 17년 4월 25일). 이후 같은 해 9월에는 영의정을 비롯해 삼공·육경이 모여 사관 대상자에게 권점을 행하고, 이어 소시하는 제도로 일부 제도의 개정이 있었다(『영조실록』 17년 9월 14일).
내용
1741년 소시법의 제정 당시에는 8개의 조목으로 절목이 정해졌다. 이에 따르면, 소시의 장소는 시어소(時御所)의 전정(殿庭)이고, 대신 및 관각의 당상과 춘추관당상관이 주관하며 시관(試官)으로 대독관(代讀官) 4명을 홍문관 관원에서 차출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도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각각 1명씩 감시관(監試官)을 파견하도록 하였다.
소시의 대상자는 삼정승 등이 모여 대상자 후보에게 권점을 매기고, 그 권점 수를 보아 대상자를 결정하였다. 처음에는 1점이라도 권점을 받은 사람은 모두 소시 대상자로 했다가 이후 이를 고쳐 차점(次點) 이상을 대상자로 하도록 개정하였으며, 이것이 『속대전』에 규정되었다. 소시는 인원수에 구애받지 않고 비록 1명이 있더라도 시행하였다(『영조실록』 18년 7월 6일). 이런 규정에도 불구하고 관원들의 요청으로 1점이라도 권점을 받은 사람은 모두 시험에 응하게 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22년 1월 13일). 단, 소시 대상자로 선발된 자가 60세 이상이면 일단 대상자에서 제외시켰다(『영조실록』 20년 6월 5일). 소시를 주관하는 시관은 응시자와는 상피(相避)해야만 하였다(『영조실록』 20년 8월 29일).
1743년 11월에는 삼정승 등이 모여 권점을 행하던 제도를 변경하여 전·현직 사관이 모여 권점을 찍는 회권(會圈)을 하되 몇 점 이상이 되는 자를 대상으로 소시하는 제도로 변경되었다(『영조실록』 19년 11월 20일). 간혹 전·현직 사관이 권점한 사람들 중에 왕의 복심(腹心)에 든 자가 없을 경우에는 왕이 별도로 어점(御點)을 찍는 경우도 있었다. 1748년 11월 채제공(蔡濟恭)의 경우가 이에 해당되며(『영조실록』 24년 11월 26일), 어점 덕분에 채제공은 소시에 응하게 되어 사관에 선발되었다(『영조실록』 24년 12월 1일).
변천
한림소시법으로 개정된 이후 1741년 12월 10일 조재덕(趙載德)이 처음으로 소시를 통해 사관으로 선발되면서 제도가 정착되는 것 같았으나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하지 않았다(『영조실록』 17년 12월 10일). 그리하여 1742년 7월 권점을 행한 후 소시를 시행할 때 권점을 받은 이의중(李毅中)·조중회(趙重晦)·신위(申暐) 등이 참석하지 않고 유언호(兪彦好)만이 응시하였다. 이후에도 반발은 계속되어 이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며(『영조실록』 18년 8월 8일), 소시로 인하여 사관이 잡류(雜流)가 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영조실록』 25년 8월 21일). 이 밖에도 1차 소시에서 적당한 사람을 가리지 못한 경우에는 추가로 추소시(追召試)라 하여 2~3차 소시를 행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폐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39년 12월 18일).
한편 사관의 소시제도는 이후 승정원 소속의 주서(注書)를 소시로 선발하는 제도의 성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주서의 경우도 주천(注薦)이라 하여 사관과 같이 자천제로 후임자를 선발하였는데, 이 역시도 1772년(영조 48)에 소시제도로 변경하여 시행하였다(『영조실록』 48년 6월 23일). 사관이나 주서의 소시는 이후 고종 연간까지도 계속되었다.
참고문헌
- 정만조 외, 『한국 역사상 관료제 운영 시스템에 관한 연구』, 국민대학교 출판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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