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방전(上方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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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주로 어보와 관인에 쓰인 전서체.

개설

상방전(上方篆)은 인전(印篆)의 한 형태로 필획을 중첩하고, 쌓아 올려 인면(印面)을 가득 메우는 서체이다. 이 서체는 중국 진(秦)나라의 정막(程邈)이 만들었다고 한다. 인장을 새기는 행위나 인장 자체를 전각(篆刻)이라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에 쓰이는 서체는 한자의 5체 중 전서체(篆書體)가 주종을 이루며 이는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어보(御寶)관인(官印)에는 이른바 ‘구첩전(九疊篆)’ 혹은 ‘첩전(疊篆)’이라고 하는 서체를 사용하였고, 이를 ‘상방전’ 혹은 ‘상방대전(上方大篆)’이라 칭하였다.

내용 및 특징

상방전은 소전(小篆)의 기본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단지 굴곡을 더해 공간을 메우는 서체이다. 필획이 많이 중첩된 경우 10첩(十疊) 이상인 경우도 있다. 첩전은 관인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중국의 경우 송대(宋代)로부터 시작하여 원대(元代) 이후에 성행하였으며 대부분 주문(朱文)이다. 이는 관인에 사용하는 특별한 서체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발생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전서는 초서(草書)와 마찬가지로 글자의 형질을 별도로 익히지 않고서는 접근하기 어려우므로 학습을 위한 교재가 존재하였다. 조선전기까지는 이러한 학습서가 발견되지 않으며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크게 『대학(大學)』이나 『중용(中庸)』 등 유교 경전을 활용한 사례와 전서 관련 운서(韻書)로 나눌 수 있다. 박영(朴泳)의 『전중용(篆中庸)』, 김진흥(金振興)의 『전대학(篆大學)』, 경유겸(景惟謙)의 『전운편람(篆韻便覽)』, 김진흥의『전해심경(篆海心鏡)』이 그것이다. 김진흥의 『전대학』에서는 상방전의 발생 배경을 “정막이 이사(李斯)를 수식하여 법을 내었다[程邈飾李斯出法].”고 기록하였다.

상방전은 같은 글자라도 인장마다 서체를 달리하고 있어 당시 전서 관련 학습서와 자전의 역할이 컸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앞에서 나열한 서적에 모두 상방전이 수록되어 있어 이러한 서적을 통해 전서를 익혀 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조정에서 전서를 익히기 위해 제도적으로 규정을 두기도 하였다.

1440년(세종 22) 의정부에서는 교서관에 자학(字學)을 권면하기 위하여 세종에게 “대전(大篆)은 비갈(碑碣)에 쓰고, 소전은 도서(圖書)에 쓰며, 상방전은 인장(印章)에 쓰는 것인데, 모두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매양 사맹삭(四孟朔)이 되면 본조와 그 학(學)의 제조가 시험해 뽑되, 먼저 대전을 쓰고 다음에 소전을 쓰며, 다음에 인전을 쓰고 다음에 팔푼(八分)을 쓰게 하여 분수(分數)를 주어서 3등급으로 나누어 시행하게 할 것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세종실록』 22년 1월 10일). 인장을 포함한 각 용도에 맞는 전서를 익히기 위한 조정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의의

첩전에 대해 명(明)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모든 인장은 매 글자마다 전서의 굴곡이 아홉 획이며 이는 ‘건원용구(乾元用九)’의 뜻”이라 하였다. ‘건원용구’는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건원용구 천하치야(天下治也)’에서 따온 말이다. 전(傳)에서는 “9를 쓰는 도는 하늘과 성인이 같으니 그 씀을 얻으면 천하가 다스려진다.”고 설명했다.

또한 현대 중국의 인장 연구자는 어보와 관인에서 ‘건원용구’의 의미를 차용한 데 대해 “건원은 천(天)의 덕(德)이며 구(九)는 양(陽)의 수로 천의 덕이니, 곧 천의 덕을 사용함, 즉 인장을 통해 하늘의 덕을 실행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조선시대 어보와 관인에서 의도적으로 첩전, 즉 상방전을 사용한 이유도 서체에 포함된 ‘건원용구’의 의미를 인장에 함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고궁의 건축물과 꽃담 등에 있는 길상문의 서체가 대부분 상방전인 점과 상통하는 현상이다.

참고문헌

  • 『전대학(篆大學)』
  • 『전해심경(篆海心鏡)』
  • 『전자편람(篆字便覽)』
  • 『전운(篆韻)』
  • 『인신등록(印信謄錄)』
  • 『외관인문(外官印文)』
  • 韓天衡 編訂, 『歷代印學論文選』, 西泠印社,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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