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총(比摠)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예년의 부세 총액을 고려하여 당해의 과세 총액을 결정하고 이를 각 도의 군현을 통하여 거두는 방식.

개설

비총(比摠)은 전총(田摠)·군총(軍摠)·환총(還摠) 등 조선후기 총액제적 재정 운영의 방식을 대표하는 용어였다. 노비신공(奴婢身貢)·어세(漁稅)·염세(鹽稅) 등의 수취방식으로도 폭넓게 적용되었다. 그러나 비총은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전세(田稅) 수취방식을 의미하였다.

1760년(영조 36) 법제화된 비총제는 『속대전』에 규정된 전세 수취의 방식과는 달리 그해의 농작물 상황에 입각하여 각종 부세의 징수액과 감면액을 결정·시행한 것이 아니었다. 호조가 미리 유래진잡탈전(流來陳頉田)을 제외한 원장부 곧 원총(元摠)과 그해의 풍흉과 비슷한 해의 수세 실총을 비교 결정[比摠]하여 당해 연도의 수세 실총과 감면 결총을 반포하면, 각 도의 감사가 그해의 사목재(事目災) 결수와 실총 이외의 결수[實摠外餘結數]를 비교하여 각 읍에 급재 결수를 삭감·분배하고 실총에 입각한 수세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전세 비총제는 조선후기 각종 부세가 점차 전결세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여타(그 밖의 다른) 부세 수취 방식의 기준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조선 정부는 수차례의 양전(量田)을 통해 수세 결수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각종 면세지(免稅地)에서 세금을 거두어 긴급한 재정을 충당해 나가고자 하였다.

1634년(인조 12) 갑술양전은 임진왜란 이전의 결수를 회복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양전사(量田使)를 파견하고, 토지 측량을 담당한 각 읍의 감관(監官)이 서로 다른 읍을 측정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또한 종래 토지의 등급에 따라 6개의 양전척을 사용하던 수등이척제(隨等異尺制)를 폐지하고, 단일한 양전척 이른바 ‘갑술척(甲戌尺)’이라 불린 ‘동척제(同尺制)’가 시행되었다(『인조실록』 12년 윤8월 27일).

그러나 갑술양전 이후 국가 재정의 근간인 경기도와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지역 양전은 거의 100여 년간 시행되지 않았다. 1663년(현종 4)(『현종실록』 4년 2월 22일)과 1669년(현종 10)(『현종실록』 10년 2월 3일)에 경기도·충청도의 부분적 양전이 시행되었을 뿐이었고, 숙종대 경자년(1720)에 이르러서야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양전이 이루어졌다(『숙종실록』 46년 1월 2일).

각 궁방과 아문에 대한 정부의 면세전 규제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따라서 대동법 실시 등으로 인하여 각종 부세가 전결세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재정 확보 방안이 마련되어야 했다.

임진왜란 이후 영정법(永定法)은 이러한 상황에서 전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마련된 방안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가 1634년(인조 12)부터 1760년(영조 36)까지 시행된 경차관 답험제(敬差官踏驗制)와 1761년(영조 37)년부터 1894년 갑오개혁까지 시행된 비총제(比摠制)였다. 『속대전』 상에 규정된 경차관 답험제는 재해의 구체적인 명칭[災種]을 지정해 내려 주는 연분사목(年分事目)의 반포→수령의 재실진기(災實陳起)의 보고→감사의 순심(巡審)→경차관(敬差官)·도사(都事)의 복심고험(覆審考驗)→호조의 세수산정에 의한 수세 절차를 통해 세수입을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양전을 통한 전품(田品) 규정 및 경작 상황의 파악이 정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재해 정도를 철저히 가리고 연분에 따라 세율을 차등 적용하는 수취제도는 실현될 수 없었다. 이에 1634년(인조 12) 이미 시년지법(視年之法)이 혁파되면서 하중년(下中年) 6두 혹은 하하년(下下年) 4두로 세액이 고정되어 갔으며, 경차관·도사의 복심은 여러 가지 폐단만을 일으키는 상태에서 유명무실해져갔다. 결과적으로 1746년(영조 22) 경차관 답험제를 명문화한 『속대전』 규정은 이미 18세기 초반 그 제도적 의미를 상실하고 또 다른 수취 관행에 의해 대체되고 있었다.

전세 수취제도의 변화는 총액의 안정적 수세와는 대척점에 있는 면세결 인정 방식, 즉 급재(給災)제도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정한(定限) 급재 방식은 토지 원장부와 재해 정도를 비교하여 일정한 재결수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재결을 마감하면 나머지는 실총이 되었으므로 재해를 당한 농지에 세금을 덜어 주는 데에 무게가 있었다. 반면 비년(比年) 급재 방식은 급재 결수(給災結數)를 가까운 몇 해 전의 풍년과 흉년 정도와 비교하여 우선 과세 대상인 실총(實摠)을 정하고 그에 준해 감면 대상인 재총(災摠)이 결정·반급되는 방식이었다. 실총 확보에 주안점을 둔 방식이었다. 이러한 급재 방식은 18세기 초반 경차관 복심에 의한 재상분간(災傷分揀)이 실효를 잃게 되면서, 급재 방식의 변통책으로서 적용되었지만 아직 정례화된 것은 아니었다.

정한 혹은 비년의 급재 방식은 일정액의 결총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이에 1730년대 무렵부터는 거의 매년 특정 해의 연분 총수를 고려하여 수세하는 비총제가 하나의 관행으로서 정착되고 있었다. 『대전통편』에서 법제화된 비총제는 경차관 파견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임금의 재가를 받아 결정하는 방식’인 임시품정(臨時稟定)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화석화된 법조문이었다. 실제 전세 수취는 호조가 유래공탈전(流來公頉田)을 일일이 제외한 원총(元摠)과 그해의 풍흉에 상당하는 연도의 수세실결인 실총을 비교하여, 당해 연도의 수세실결인 실총과 면세 결수인 재총을 각 도에 반급하였다. 이에 따라 각 도의 감사는 당해 연도의 사목재결의 수량과 각 도 실총 이외의 결수를 상호 비교하여 각 읍에 급재 결수를 삭감·분배하고 실총에 입각한 수세를 시행하였다.

비총제는 경차관 답험제에 비해 운영상 몇 가지 장점이 있었다. 우선 비총제는 감사가 전정을 책임 운영함으로써 경차관 복심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폐단을 제거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 정부는 안정적 세수 확보를 전제로 하는 연분 총수를 각 도에 내릴 수 있었다. 즉, 수세 총액을 결정할 때, 예년(例年)의 상년·중년·하년 때의 수조실답(收租實畓) 총액과 급재명(給災名)·급재 결수를 비교한 뒤 그해의 실총과 재총을 반포한 것이다.

한편 비총제는 이전 경차관 답험제가 갖고 있었던 한전불급재(旱田不給災) 원칙에서 비롯되는 폐단에도 변통의 여지를 가질 수 있었다. 『속대전』의 급재 방식은 이앙을 하지 않은 땅, 수해를 입은 땅 등 구체적인 재종(災種)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이외의 급재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비총제는 비총외(比摠外) 여결(餘結)의 추이급재(推移給災)를 통해 사목외(事目外) 재전(災田)에 대한 급재가 시행되기도 하고, 한전급재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는 등 각 지역에서의 탄력적 운영의 가능성을 열었다.

변천

비총제는 운영 과정에서 각 계층 간의 사회적 이해관계가 분출되면서 변화·발전해갔다. 1차 갈등 구조는 실총과 재총 확보를 둘러싼 중앙정부와 감사 사이에서 일어났다. 다음은 각 고을 간의 급재 결수에 따라 조세를 감면해 주는 과정과 수세실결에 따른 수취 과정에서 감사와 수령, 수령과 향촌 세력 사이에서 2차 갈등 구조가 발생하였다. 이에 비총제는 제도상의 긍정적 평가 요소에도 불구하고 그 운영 과정에서 조선 정부와 감사·수령·향촌지배 세력 그리고 민 사이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을 낳고 있었다.

감사는 합법·비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급재 결수를 많이 확보하려고 하였다. 감사는 가능한 한 많은 재결을 확보하기 위하여 연분사목의 사목재 이외 많은 양의 가청재(加請災)를 빈번히 요구하였다. 또한 감사는 처벌을 무릅쓰고라도 사목외(事目外) 천급재(擅給災)를 통해 급재를 늘리거나, 유래공탈전이 이미 제외된 수세 총액에 다시 각종 면세지를 제외하는 등 비합적인 방법으로 급재 결수를 늘리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중앙정부는 합법적 가청재 이외의 천급재 및 각종 불법행위에 대해 급재 결수의 환추(還推)와 처벌로 맞서면서 감사의 불법을 금단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는 ‘대체(大體)만을 짐작·분배하는’ 비총제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비총제 운영의 2차 갈등 구조에서도 수세를 둘러싼 사회 제 세력 간의 이해관계는 급재 결수의 확보에 있었다. 보다 많은 급재 결수의 확보는 향촌 그리고 세의 직접 부담자인 민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였다. 각 고을에서는 감영으로부터 분급된 적은 급재 결수를 가지고 많은 실총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총제 하에서 각 읍의 전정 운영은 수령과 이서·서원·면임 그리고 토호와 부민들에 의한 집재(執災)·표재(表災)·작부(作夫)를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비총제는 수세 단위의 세분화와 향촌 관행에 의한 수취 구조를 형성해 가고 있었다. 즉, 18세기 연분(年分)의 단위는 읍(邑)을 단위로 한 초실(稍實)·지차(之次) ·우심(尤甚)의 3분등이 원칙이었다. 초실은 한 읍의 토지를 4분할 때 3분 정도의 수확이 있는 읍을, 지차는 이것의 절반, 우심은 1분만의 수확을 본 읍을 말하였다. 그러나 비총제 실시 이후에는 점차 읍을 다시 3분등한 면분등(面分等)이 보편화되기 시작하여 면리(面里)가 하나의 수세 단위를 이루어 갔다.

면분등의 보편화는 필연적으로 향촌지배 세력에 의해 수취 체제가 운영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조선 정부가 총액제 운영을 통해 안정적인 수세를 확보하려는 과정에서 이를 운영하는 향촌지배 세력의 존재를 일정하게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총에 파악되지 않는 은결(隱結)과 위결(僞結)이 있다는 것은 중앙에서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총액을 채워낼 수만 있다면 굳이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수령과 감사가 근거할 문서와 제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세의 과정을 향촌의 관행에 맡기게 되었음을 말한다.

따라서 비총제 실시 이후에는 수령·이서·부민의 상호연관 속에서 양호(養戶)·제역촌(除役村)·계방촌(契房村) 등이 이전보다 성행하고, 은결과 여결이 구조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수령 및 향촌지배 세력은 감영으로부터 할당된 실총만 채운다면 전세 수취의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부세 수취 전반에 걸쳐 그들의 이익을 관철시켜 갈 수 있었다.

비총제는 첫째, 전통적인 토지지배의 관철이 어려워진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상황과 조선 정부의 안정적인 재정 확보 노력이 맞물리면서 야기된, 실결 위주의 총액제적 전세 수취 방식이었다. 둘째, 비총제는 원래 전세 수취 방식으로 출발하였으나, 점차 전결세 일반·군정·환정 등 조선후기 총액제적 부세 운영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어세·선세·노비신공 등 다른 부세 수취 방식의 전형(典型)이 되었다. 셋째, 비총제는 수세 단위의 세분화와 향촌 관행에 의한 수취 구조를 형성하면서 19세기 도결(都結)로 확대·전환되어 갔다. 이는 조세 금납화를 촉진시켜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수취제도의 해체에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Ⅰ』, 일조각, 1984.
  • 손병규, 『조선 왕조 재정시스템의 재발견: 17~19세기 지방 재정사 연구』, 역사비평사, 2008.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 이철성, 『17·18세기 전정 운영론과 전세 제도 연구』, 선인, 2003.
  • 박종수, 「16·17세기 전세의 정액화 과정」, 『한국사론』 30, 1993.
  • 송양섭, 「『부역실총』에 나타난 재원 파악 방식과 재정 정책」, 『역사와 현실』 70, 2008.
  • 안병욱, 「19세기 부세의 도결화와 봉건적 수취 체제의 해체」, 『국사관논총』 7, 1989.
  • 이철성,「18세기 전세비총제의 실시와 성격」, 『한국사연구』 81,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