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불(闢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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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들의 불교 배척.

개설

조선은 건국 초기 유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이념적으로 불교를 배척하였다. 사실 불교의 폐단에 대한 지적은 고려초기부터 있었으나, 후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불교 교단의 폐단과 모순을 시정하라는 요구가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유학을 국교로 삼으면서 불교에 대한 배척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내용 및 특징

고려말기 불교와 유교는 서로 공존하였으나 불교의 폐단과 모순이 드러나자, 유학자들은 그것을 시정하는 차원에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조선이 유교를 국교로 하여 건국하면서 불교를 배척하기에 이른다. 그 선두에 있었던 학자가 바로 정도전(鄭道傳)이었다.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20가지 조목을 들어 불교를 비판하였다. 주요 비판 대상은 불교의 인과설(因果說), 윤회설(輪回說), 화복설(禍福說) 등과 세속의 신앙과 결부된 불교의 교리 등이었다. 이후 유학자들은 그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불교의 출세간적 측면에서 인륜을 무시하는 비윤리성, 그리고 부역을 면제받으려고 승려가 되는 폐단 등을 적극 비판하였다.

최초의 훈민정음 서적인 『용비어천가』에서는 태종의 성덕을 읊으면서 백만불찰(百萬佛刹)을 하루아침에 고친 것은 태종이 불교를 배척한 성덕이라고 말하였다. 태종은 불교의 폐해를 알고 사찰을 열에 한두개만 남겨두고 사찰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는 관할 군(郡)에서 수용하였다. 특히 당시 불교에는 여러 종파가 있었는데 선(禪)과 교(敎)의 두 종파만 남겨두자, 사대부들은 일반 백성들이 상제(喪制)에 이미 불법을 사용하지 않은 이가 많은데, 지금 완전히 뿌리를 뽑지 않는다면 추후에 다시 퍼질 것이라고 경계하였다(『세종실록』 14년 3월 5일).

세종대에 집현전 부제학최만리(崔萬理)가 사리탑 경찬회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세종은 태조의 예에 따라 수리한 것인데 경비 문제로 백성의 원망이 많기에 ‘공법’을 시험하여 손실법의 폐단을 없애고 민생을 편리하게 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하면서 불교를 배척하는 데 관계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세종실록』 23년 윤11월 14일).

성종대 대사헌김유 등이 절의 땅을 혁파하지 않는 데 대한 부당함을 상소하며 불교를 배척하였는가 하면(『성종실록』 9년 8월 29일), 김승경(金升卿)자운사(慈雲寺)의 수리에 대한 대체를 제대로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불교만 배척하는 광망(狂妄)한 말을 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1년 5월 28일). 또한 장령(掌令)구치곤(丘致崐)과 정언(正言)윤석보(尹碩輔)는 유생들이 타당하지 않은 말로 불교를 배척하였지만 그 일로 그들을 감옥에 가두면 언로를 막는 것이라는 뜻을 피력하여 언론의 자유를 말하기도 하였다.

또 선조대에 유생들이 소장을 올려 불교를 비판하자, 선조는 "참된 유사(儒士)가 되어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면서 위로는 왕을 돕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은택을 끼쳐 정치를 융성하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한다면 유학이 쇠퇴하고 이단이 융성하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라고 하여 지나친 불교 배척보다는 유생들이 학문에 힘쓸 것을 권면하였다.

참고문헌

  • 윤사순, 『한국유학사-한국유학의 특수성 탐구』, 지식산업사, 2012.
  • 현상윤 지음, 이형성 교주, 『현상윤의 조선유학사』, 심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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