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림역(方林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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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원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보안도에 속한 역.

개설

방림역(方林驛)은 고려시대에는 양계(兩界) 가운데 동계(東界) 지역의 역도(驛道)인 명주도(溟州道)에 소속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전국적으로 역로가 재편되면서 강원도 지역의 역도인 대창도(大昌道)에 속하였으며, 세조대에는 보안도(保安道)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보안도의 속역으로 존속하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명주도에 소속된 28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명주에 위치하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의 역제(驛制)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문종대 이후에 명주도에 편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명칭은 방림역(芳林驛)이었는데, 이후 방림역(方林驛)으로 개칭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직 및 역할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강원도 강릉 편에 따르면, 당시 방림역에는 역리(驛吏) 30명, 역노(驛奴) 15명, 역비(驛婢) 11명과, 기마(騎馬) 1필, 복마(卜馬) 4필 등 5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방림역은 조선시대 전기부터 군사 훈련장으로 활용되었는데, 1449년(세종 31)에는 세자가 강무(講武)를 대행하도록 하기 위해 방림역 일대에 강무장을 설치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31년 4월 17일). 한편 1540년(중종 35)에는 사헌부에서, 강릉의 유생과 관리들이 방림역의 역마를 이용해 한양을 왕래하거나 짐을 운반하는 까닭에 역이 쇠잔해지므로 관련자를 색출해 처벌할 것을 건의하였다(『중종실록』 35년 2월 19일).

변천

조선 건국 후 전국적으로 역도와 역로 조직이 정비되는 과정에서 방림역은 대창도에 소속되어 대창도 역승(驛丞)의 지휘를 받았다[『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 그 뒤 1457년(세조 3)의 역승 폐지 조치로 찰방의 순시 범위가 넓어지면서, 각 역도에 소속된 역의 수가 많고 역 사이의 거리가 멀어 제대로 순시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역로가 쇠퇴하는 등의 각종 폐단이 발생하자, 1462년(세조 8)에 대대적인 역로 개편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방림역은 보안도의 속역으로 편성되어 보안도 찰방(察訪)의 통제를 받았으며, 역의 명칭 또한 방림역(方林驛)으로 변경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뒤이어 성종대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되면서 확립된 역도 체제에서도 별다른 변화 없이 보안도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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