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跋)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주로 책이나 글의 뒤에 써서, 서적 간행의 경위를 기록하면서 작가 자신의 견해를 함께 드러내는 문체.

개설

발(跋)은 서발체(序跋體) 산문에 속하며, 서적의 간행 경위와 작가 자신의 견해를 서술한다는 점에서는 서(序) 혹은 서(敍)와 동일하다. 발문(跋文)이라고도 한다. 본디 족(足)에서 뜻을 취하여 ‘발로 밟는다’는 의미를 지녔는데, 거기서 파생되어 뒤에 놓이는 것을 모두 발이라고 하게 되었다. 발은 서와 유사하지만, 서는 자세하고 발은 간단하다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당나라 이전에는 서를 책의 앞에 둘 수도 있고 책의 뒤에 둘 수도 있어서, 책의 뒤에 두는 것을 ‘후서’라고 하였다. 송나라 때 발이 출현하기 시작하였으니, 구양수의 「집고록발미(集古錄跋尾)」 240여 편이 있다. 발이 출현한 이후 서가 보통 책의 앞에 놓이는 반면에, 발은 책의 뒤에 놓여 서후(書後), 제후(題後)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중엽부터 발달하였으며, 사림파가 등장한 조선 중종 이후에는 철학성을 띠게 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문집이 활발히 간행됨에 따라, 학문과 사상의 연원, 작가의 삶과 내면 의식을 진지하게 탐색한 발문이 많이 등장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이규보(李奎報)는 전주에서 『동파문집』을 간행하면서 지은 발문인 「전주신조동파문집발미(全州新雕東坡文集跋尾)」에서, 소동파의 풍부한 속사(屬辭)와 넓은 용사(用事)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이황(李滉)은 깊이가 있고 이론이 정제된 발문을 많이 남겼다. 이황은 「서조남명유두류록후(書曹南冥遊頭流錄後)」에서, 조식의 유람이 이로(理路)를 중시하여 여유로운 맛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황은 근거를 살피고 사실을 궁구한다는 ‘고거핵실(考據覈實)’의 요건을 지키면서, 삼가는 경(敬)의 자세를 발문에 담았다. 김규(金戣)가 이황에게 칠군자찬 및 잠명과 주자의 서식강도처 첩에 붙인 발문(「跋金景嚴戣所求七君子贊及箴銘朱文公棲息講道處帖」)을 써 달라고 하자 이황이 써 준 글이 그 한 예다. 이 글에서 이황은 주희가 거처하면서 강학했던 고정(考亭)·죽림정사(竹林精舍)·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의 위치와 거처한 시기를 간결한 문체로 논증했다.

한편 최명길(崔鳴吉)은 인조 연간에 이서(李曙)가 『마경(馬經)』 4권을 간행하자, 「마경발(馬經跋)」을 지어 마정(馬政)의 중요성을 논하였다. 또 윤선도(尹善道)는 「어부사시사후서(漁父四時詞後敍)」에서 조선 어부사의 계보를 탐색하고 자신이 창작한 「어부사시사」의 형식과 의의에 대해 소개하는 한편, 우리나라 시가의 음률에 대해 논하였다. 후서라고 하였으나 발문으로 보아야 한다. 이식(李植)은 「이암집후서(頤菴集後敍)」에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국어(國語)』·『사기(史記)』·『한서(漢書)』를 모방하는 의고파와 인의 도덕을 근본으로 하는 도학자를 대립시킨 뒤, 양자를 극복·지양해야 진정한 고문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후기에는 문집의 발문을 자신의 문학론을 전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김상헌(金尙憲)이 그의 스승인 월정윤근수의 문집에 쓴 「월정선생집발(月汀先生集跋)」에서, 조선시대 초부터 당시까지 문장의 역사를 논하였다. 그에 따르면 조선의 문장은 변계량(卞季良) 이래로 당송의 고문을 본받은 연미(軟美)한 관각체를 형성했으나, 윤근수(尹根壽)가 고문을 전공하여 문풍을 쇄신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 후기에는 발문을 서적의 취득 경위나 독후감을 적는 기록문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영조 연간에는 사대부들이 청나라 강희제의 『어선고문연감(御選古文淵鑑)』을 두루 읽었는데, 역관 김지남(金指南)이 수입해 온 책을 이기(李沂)가 김지남의 손자 김홍철(金弘喆)로부터 구입하자, 이기의 아들 이용휴는 그 경위를 「고문연감발(古文淵鑑跋)」에서 밝혔다.

참고문헌

  • 심경호, 『한문산문의 미학』(수정증보), 고려대학교출판부, 201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