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천(朴應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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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미상~1581년(선조 14)].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혼중(渾仲)이다. 행직(行職)은 사재감 정(司宰監正)이고, 증직은 좌찬성(佐贊成)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인데, 아버지는 사간원 사간(司諫)박소(朴紹)이고,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사섬시 정(司贍寺正)홍사부(洪士俯)의 딸이다. 증조부는 상주목사(尙州牧使)박임종(朴林宗)이고, 조부는 이조 정랑박조년(朴兆年)이다. 박응순(朴應順), 박응남(朴應男), 박응복(朴應福), 박응인(朴應寅)의 형이다. 선조비(宣祖妃)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백부(伯父)이다.

중종 · 인종 · 명종 · 선조 · 시대 활동

1543년(중종 38)에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仕)로 합격하고,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이어서 태인현감(泰仁縣監), 형조 정랑, 호조 정랑을 거쳐 봉산군수(鳳山郡守)와 고양군수(高陽郡守)를 지냈다. 그 후 대구부사(大邱府使), 이천부사(利川府使), 수원부사(水原府使)와 광주목사(廣州牧使), 양주목사(楊州牧使)를 거쳐 군자감(軍資監) 판관(判官), 군기시(軍器寺)첨정(僉正),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예빈시(禮賓寺) 부정, 사재감(司宰監)정(正)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대구부사로 있을 때는 단종(端宗)을 복위하려다가 죽음을 당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후손 박충후(朴忠後)가 대구에서 천역(賤役)을 하는 것을 보고 그를 노비문적에서 빼내어 천역을 면하도록 해 주었다. 1581년(선조 14) 9월에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응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어 집안이 더욱더 빈한해졌으나, 가업을 경영하여 부족함이 없이 봉양하였고, 여러 아우들을 방도 있게 가르치는 등 성인(成人)처럼 의연하게 대처하였으므로 안팎에서 모범으로 삼았다. 장성하여 관직에 나아가서는 겉치레를 일삼지 않고 명예를 구하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자품이 엄숙하고 굳건하였으나 온화하였다. 성품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자제들의 옷이 화려할 경우에는 말하기를, “선비는 마땅히 떨어진 옷을 입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왕실(王室)과 혼인한 뒤로는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우리 가문에 좋은 선비가 많으니, 너희들은 외부 사람들과 널리 사귈 필요가 없다. 외부 사람들과 널리 사귈 경우에는 가식이 생겨 질박함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 가문의 성실한 기풍을 잃어버릴까 염려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항상 말하기를, “사람이 지식을 쌓지 않으면 덕행을 쌓을 수 없다.”고 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금촌(金村)에 있다. 이항복(李恒福)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첫째부인 신씨(愼氏)는 자녀가 없었다. 둘째부인 김씨(金氏)는 별좌(別坐)김희려(金希呂)의 딸인데, 6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 박동현(朴東賢)은 사간원 사간(司諫)이고, 2자 박동호(朴東豪)는 사옹원 참봉(參奉)이며, 3자 박동로(朴東老)는 승문원 정자(正字)이고, 4자 박동준(朴東俊)은 의빈부 도사(都事)이며, 5자 박동민(朴東民)은 예빈시 참봉(參奉)이고, 6자 박동선(朴東善)은 안동부사(安東府使)로서 원종공신이 되었다. 1녀는 배천군수(白川郡守)임태(任兌)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안경남(安慶男)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사마방목(司馬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잡록(海東雜錄)』
  • 『동각잡기(東閣雜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