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여검(閔汝儉)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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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민여검 |
한글표제 | 민여검 |
한자표제 | 閔汝儉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광해군~인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종례(宗禮) |
호 | 운촌(雲村), 운곡(雲谷)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4년(명종19) |
사망 | 1627년(인조5) |
본관 | 여흥(驪興) |
주거지 | 전라도 전주(全州) |
묘소소재지 | 충청도 회덕(懷德) 삼정동(三政洞) |
증조부 | 민귀손(閔龜孫) |
조부 | 민제인(閔齊仁) |
부 | 민사용(閔思容) |
모_외조 | 광주이씨(廣州李氏): 이위(李緯)의 딸 |
형제 | (형)민여건(閔汝健), 민여준(閔汝俊), 민여신(閔汝信), 민여간(閔汝侃), 민여임(閔汝任) (동생)민여길(閔汝佶) , 민여우(閔汝佑) |
처_장인 |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정란(李廷鸞)의 딸 |
자녀 | (1자)민평(閔枰) (2자)민해(閔楷) (3자)민환(閔桓) (1녀)정홍임(鄭弘任)의 처 (2녀)남두화(南斗華)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민여검(閔汝儉) |
총론
[1564년(명종19)∼1627년(인조5) = 64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자는 종례(宗禮), 호는 운촌(雲村) · 운곡(雲谷)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전라도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군수 민사용(閔思容)이고, 어머니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이위(李緯)의 딸이다. 좌찬성(左贊成)민제인(閔齊仁)의 손자이고, 참판민여임(閔汝任)의 동생이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13년(광해군5)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 · 박사 · 전적(典籍) 등을 역임하였으나 권신과의 불화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서용되어 곽산군수(郭山郡守)가 되었는데,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선두에 서서 선봉장 박영서(朴永緖), 평안도관찰사이상길(李尙吉), 삭주부사민인길(閔仁佶) 등과 함께 활발히 활약하여 황주 · 삭주 등지에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에 도리어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그 해 11월에 울산부사(蔚山府使)로 복직되었다. 조정에서 시행한 호패법(號牌法)의 명부를 기일 내에 작성하지 못한 죄로, 1626년(인조4) 겨울에 서울로 소환되었다. 도중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모든 요새가 연이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국충정에서 고심하다가 괴산에서 병사하였는데, 1627년(인조5) 2월 7일의 일이었다.
성품과 일화
민여검(閔汝儉)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만한 용모에 체구가 크며 사람됨이 청렴하고 욕심이 없이 깨끗하고 굳세었다. 그는 본인이 생각하는 대로 행하고 남을 붙좇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므로, 절의를 지키고 고상한 지조를 유지하였다.
그가 곽산군수(郭山郡守)로 부임한 이후 능한성(凌漢城)을 축조하였는데, 그가 손수 흙과 돌을 져서 나르는 것을 본 아전과 백성들이 앞 다투어 성을 쌓아서 한 달을 넘기지 않고 완성하였다. 한 번은 그의 말안장이 해진 것을 본 비장(裨將)이, “안장은 전쟁 도구입니다.”라며 안장을 갈기를 청하자, 그는 “왜란 때에 적을 만나자 달아난 자들이 어찌 말 안장 때문이었던가?”라고 하고 거절하였다. 그는 종일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밤에는 그것을 깔고 누워 자서 이마가 벗겨졌는데도 끝내 벗지 않았다. 조정에서 그의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수어대장(守禦大將)에 임명하자 그는 영내(營內)의 수령(守令)에게 “조만간 성채에 올라가 방어해야 할 터인데, 내가 한걸음 뒤로 물러나거든 그대가 나를 베고, 그대가 한걸음이라도 물러서면 나도 그대를 벨 것이다.”라고 하며 국가에 대한 절의를 나타냈다.
<이괄의 난> 때에, 그는 관찰사이상길을 따라 순천(順川) · 숙천(肅川)의 경계에 이르렀는데 군중(軍中)의 군졸들이 밤에 놀라서 모두 흩어졌다. 그는 동요하지 않고 이튿날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고 관찰사를 찾아가 관찰사의 인신(印信)을 돌려주니, 관찰사가 부끄러워하였다. 진군 도중 강에 이르렀는데, 다른 장수들이 강 건너기를 주저하자, 그가 앞장서서 강을 건넜다. 이때 그의 옷소매를 잡고 말리는 자가 있었으나 옷소매를 칼로 끊어버리고 건너니, 마침내 여러 장수들도 그를 따랐다. 그는 선봉장(先鋒將) 정충신(鄭忠信) 등을 따라 안령(鞍嶺)에 이르러 적을 쳐서 이겼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충청도 회덕(懷德) 삼정동(三政洞)의 선영에 있는데,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이씨(李氏)는 부윤(府尹)이정란(李廷鸞)의 딸인데,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다. 3남 민환(閔桓)은 의금부 도사(都事)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동사록(東槎錄)』
- 『속잡록(續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일사기문(逸史記聞)』
- 『인재집(訒齋集)』
- 『월사집(月沙集)』
- 『남파상국집(南坡相國集)』
- 『이계집(耳溪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