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수가록(耗數加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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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곡의 일부를 각 아문에 관할을 옮겨 경상비로 사용하던 것.

개설

본래 가록은 ‘장부에 더하여 기록하는 것’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예컨대 관직 제수 대상자의 명단에 새로운 사람을 더 올린다거나, 혹은 재정 운영 기구에 새로이 수입을 늘려 주어 장부상에 기록하게 하는 것 등을 모두 가록이라 하였다. 한편 가록은 환곡 용어로도 사용되었는데, 환곡의 모곡(耗穀) 중 일부를 각 재정 관서의 경상비(經常費)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을 일컫는 용어로, 모수가록(耗數加錄)이라고도 하였다(『현종개수실록』 5년 11월 22일). 본래 모곡은 환곡의 원곡(元穀)을 보존하기 위하여 자연감소분을 추가로 징수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 명종대 이후부터는 모곡 중 일부를 호조(戶曹)로 이관하여 국가의 경상비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의미의 용어로 회록(會錄)이란 말도 함께 쓰였는데, 회계 장부에 기록하여 경상비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환곡의 모곡을 경상비로 전용(轉用)하는 법제적 조치는 16세기 중엽에 이루어졌다. 16세기에는 1결당 전세(田稅) 수취량이 4두(斗)로 하향 고정화되어 세입이 줄어든 반면, 재정 지출은 증가하여 국가의 비축곡이 점차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국가의 재정 운영은 전반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명종대에 모곡 가운데 1/10을 호조의 경상비로 사용하도록 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 전란과 17세기 빈번한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은 국가의 재정 운영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이에 따라 효종대 이후로는 모곡 중 3/10을 경상비로 전용하도록 하였다. 이후 모곡 중 경상비로 전용하는 비율은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이에 따라 환곡을 통한 수입이 전체 국가 세입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커졌다.

내용

모곡을 재정 용도로 전용한 초기에는 모곡 중 1/10에 해당하는 양만큼을 가록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일분회록(一分會錄)이라 하였다. 즉, 환곡의 원곡 100석을 분급하면 이를 회수할 때 원곡 100석과 더불어 모곡 10석을 징수하고, 이 모곡 10석 중 1석을 호조로 이관하여 경상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효종대에는 삼분회록(三分會錄)이 시작되어 재정으로 전용되는 모곡의 수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이후에 경상비로 사용되는 모곡의 양은 점차 증가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모곡의 전체를 전용하기도 하였다.

19세기 초에 이르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져, 상평청의 환곡은 법전에 따라 모곡의 4/5를 재정으로 사용하고, 호조에서 관리하는 환곡은 9/10를, 그 밖의 경우는 모조 전부를 재정 용도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환곡은 본래의 진휼 기능보다 재원 마련책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져, 각 아문과 군영 등에서는 경쟁적으로 환곡을 설치·운영하게 되었다.

환곡의 모곡이 전체 중앙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증가하여, 19세기에는 중앙 재정의 35% 이상이 모곡을 통해 마련되었다. 전세·대동미가 차지하는 비중이 46%, 군포 수입이 16%에 달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환곡이 국가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변천

환곡 운영이 점차 재정적 성격을 띠게 되면서, 18~19세기에 이르면 환곡의 폐단이 국가적인 문제로 부각하였다. 19세기 후반 전국적인 농민 항쟁의 주된 원인 역시 환곡의 폐단에 있었다. 농민들의 요구는 대부분 환정(還政)을 개선하는 것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19세기 말엽에는 환곡의 전체 양이 대폭 감소되었다. 이후로는 사창제(社倉制)가 시행되어 환곡의 진휼 기능은 민간의 사창에 의해 수행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환곡은 폐지되었고, 그 후 환곡의 모곡 대신 결세를 거두어 재정을 충당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만기요람(萬機要覽)』
  •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Ⅰ』, 일조각, 198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