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향(免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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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리의 역을 면제하는 일.

개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부의 중앙 집권화 정책과 전면적인 군현제도 실시에 따라, 향리(鄕吏)의 권한은 축소되고 신분과 직역(職役)은 고정화되어 갔다. 향리의 업무인 향역(鄕役)은 보수가 없는 고된 업무였으며 세습적으로 이어졌다.

조선중기부터 국가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자, 향역을 기피하는 향리층을 대상으로 면향첩(免鄕帖)을 판매하기도 하였다. 면향첩 판매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더욱 확대되었고, 이후에도 전란과 기근이 있을 때마다 지속되었다.

내용 및 특징

향리는 지방관청에 속하여 해당 지방의 행정을 맡아 보고, 지방 사정에 어두운 지방관을 보좌하던 토착적이고 세습적인 하급 관리를 일컬었다. 통일신라말기 지방 호족 세력이었던 이들은 고려왕조의 지배 체제 안으로 흡수되어 중앙 집권화 정책과 지방제도 개혁 과정에서 지방행정의 말단 실무자로 그 위상이 고착되어 갔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중앙 집권화 정책과 전면적인 군현제도의 실시에 따라 향리의 권한이 축소되고 신분·직역이 굳어졌다. 향리의 직무인 향역은 세습하는 것을 의무로 하였다. 이들은 일반 서무로서 조세·공부(貢賦)의 징수와 요역(徭役)의 동원, 그리고 송사(訟事)의 처리 등을 수행하였다. 징집한 조세와 공물의 조운, 중앙과 지방관아의 상번 입역(上番入役), 역참에의 교대 입역, 경저(京邸)의 관리·운영 등도 이들의 업무였다.

향리들은 고된 향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합법적으로 향리의 역을 면제 받는 사람은 『원육전(元六典)』에 의하면, 제술업에 급제한 사람, 진사·생원 출신자, 특별한 군공을 세우거나 이전에 공패(功牌)를 받은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또한 한집에 아들 3명이 모두 역을 지게 되면 그중 아들 1명은 역을 면제해 주는 제도인 삼정일자(三丁一子)로 뽑혀 지방관의 신고로 향역을 면제받은 사람도 있었다(『세종실록』 12년 1월 5일).

한편, 조선 정부는 일정량의 곡식을 납부하는 자에 대해 향역을 면제해 주는 납속면향(納粟免鄕) 정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미 1439년(세종 21)에 공조참의 박연(朴堧)은 지방 의창(義倉)을 보충할 방책으로 주현의 인리(人吏) 가운데 200석을 바친 자는 본역(本役)을 영구히 면해 주고, 50석을 바친 자는 자신에 한하여 면역케 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1년 11월 11일).

변천

향리에 대한 납속면향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구체화되었다. 전란 초기 군량 모집을 위해 면향첩을 판매한 데 이어, 1593년(선조 26) 2월에는 향리의 납속면향에 대한 좀 더 세부적인 방안이 나오기도 하였다.

호조(戶曹)에서 만든 『납속사목(納粟事目)』에 따르면, 향리가 쌀 3석을 내면 3년간 역을 면제하고 14년에 이르기까지 매년 1석을 더하여 15석에 이르면 당사자의 역을 면제해 주었다. 또한 30석을 내면 향리의 역을 면제하여 참하(參下)의 영직(影職)을 제수하고, 40석이면 그의 자식 2명까지 역을 면하여 참하의 영직을 제수하고, 45석이면 상당한 군직(軍職)을 내리고, 80석이면 동반의 실직(實職)을 제수하였다(『선조실록』 26년 2월 16일).

이에 따라 경제적 여유가 있는 향리들은 면향첩을 구입하여 고된 향역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납속량이 많거나 거듭 납속하면 관직을 받을 수도 있게 되었다. 이후 향리들은 지방에서 독자적인 자치 조직과 확고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지방 세력화하여 사회적 지위를 높여 나가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권기중, 『조선시대 향리와 지방 사회』, 경인문화사, 2010.
  • 서한교, 「17·8세기 납속책의 실시와 그 성과」, 『역사교육논집』 15, 1990.
  • 김만일, 「조선 초기의 향역」,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9.
  • 서한교, 「조선 후기 납속 제도의 운영과 납속인의 실태」,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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