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東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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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성부 동부(東部)에 설치되어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립 학교.

개설

동학은 예조 속아문인 사학(四學)의 하나로, 중등 유학 교육을 위해 설치되었다. 동학에는 교수(敎授)훈도(訓導)가 배치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학생 중 성적이 우수한 자는 선발해서 성균관에 올려 교육하였다. 조선전기부터 교육적 성과를 높이기 위한 고강(考講)이나 제술(製述) 등의 시험 제도가 운영되었으나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유명무실한 채 존속하다가 한말 신교육이 수용되면서 소멸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동학의 전신은 고려 말에 설치된 동부유학(東部儒學)이다. 조선 건국 직후부터 이를 계승해서 운영하였으나[『태조실록』 2년 3월 20일], 독립된 공간을 갖지 못하였기에 사찰인 순천사(順天寺)를 빌려서 사용하였다[『정종실록』 2년 8월 21일]. 1411년(태종 11) 남학(南學)의 건립을 시작으로 1435년(세종 17)까지 서학, 중학, 동학이 건립되었다. 동학이 건립된 정확한 설치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1422년(세종 4) 12월까지 아직 건물이 세워지지 않았고[『세종실록』 4년 12월 12일], 1435년 8월 왕이 동부학당을 수리하도록 지시하였음[『세종실록』 17년 8월 11일]을 볼 때 이 사이의 시기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1438년(세종 20) 3월에는 동학을 여진인 접대를 위한 북평관(北平館)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대신 창선방(彰善坊) (현 서울 원남동·인의동·연지동·효제동·종로 5가 일부 지역)에 있는 유우소(乳牛所)를 사용하게 하였다(『세종실록』20년 3월 20일). 북평관이 동부의 흥성방(興盛坊) (현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동학은 흥성방에서 창선방으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1466년(세조 12) 1월 관제 개편으로 4부 유학이 4학으로 개칭될 때 동부유학도 동학으로 개칭되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조직 및 역할

동학은 다른 사부학당과 마찬 가지로 처음에는 종6품의 교수(敎授, 敎授官) 2명, 정9품의 훈도(訓導) 2명씩이 배정되었다. 이들은 성균관 관원이 겸하였다(『태종실록』11년 11월 16일). 1466년(세조 12) 1월 동부유학을 동학으로 개칭하면서는 겸직제를 폐지하고 전임(專任) 관원으로 차출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그러나 동학을 포함한 사부학당 관원에 결원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고[『성종실록』 16년 4월 8일], 이들이 제사의 집사(執事)로 차출되기도 하여[『성종실록』 22년 5월 22일] 제대로 학당이 운영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승문원과 교서관의 권지(權知) 관원들을 훈도로 차출하여 교육시키는 방안이 강구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24년 5월 5일].

동학을 비롯한 사부학당에서는 10세 이상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15세 이상이 되면 어느 정도 학업이 성취된 유생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쳐 성균관에 진학하게 하였다[『태종실록』 11년 11월 16일]. 그러나 초기부터 동학을 포함한 사부학당의 교육적 성과는 그리 높지 못하였다. 이를 제고시키기 위한 대책으로 1469년(예종 1) 5월에는 사부학당 유생 중 80명을 선발해서 고강(考講)이나 제술(製述) 등 시험을 보게 하거나[『예종실록』 1년 5월 6일], 사헌부(司憲府)나 예조(禮曹)가 감찰하게 하는[『성종실록』 14년 2월 27일] 등 다양한 대책이 강구되었지만 크게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변천

동학은 연산군대에 일시 철거되었다가(『연산군일기』 12년 4월 24일) 중종반정 이후에 다시 복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초반에 이르러서 다시 복구되었다(『광해군일기(중초본)』 1년 11월 30일).

한편 동학 등 사학의 관원은 1654년(효종 5)에는 김익희(金益熙)의 건의로 왕을 측근에서 모신 시종신(侍從臣)을 겸교수(兼敎授)로 차출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여기에 이은상(李殷相)이 차출되었다[『효종실록』 5년 10월 4일]. 겸교수 직제는 이후 숙종 초에 잠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곧 다시 복구되어 『속대전』에 규정되었다. 영조대에 간행된 『속대전』에는 정원이 축소되어 교수와 훈도 모두 1명으로 규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동학을 비롯한 사학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거의 교육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유명무실하게 존속하다가 한말 신교육이 수용되면서 없어졌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한우근 외 역, 『(역주)경국대전-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 이광린, 「선초의 사부학당」, 『역사학보』16, 1961.
  • 피정만, 「조선시대 성균관·사학의 유생에 관한 연구」, 『한국교육사학』3,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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